쇼팽 발라드 1번

내가 이 곡을 처음 연주하려고 결심한 것이 스물 셋, 그때는 집에서 공익을 다닐 때라 퇴근하고 하루에 한시간씩 연습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연주한 횟수만 치면 수천번은 넘겠지만, 이지 리스닝 곡이나 치는 수준에 감당 할 수 없는 곡. 우여곡절 끝에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는 하는데 다른 곡이 나와버린다. 그러다 집을 떠나 13년만에 다시 이곡을 접하면서 여러가지 느낀다.

레슨을 받으면서 이 곡의 구조적인 특징과 그 미묘한 화성들의 연결에 새삼 감탄하게 된다. 레슨을 받아야만 알 수 있는 그런 세계. 왼손과 오른손을 구별해서 연주하며 멜로디 라인의 연결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고 왼손 반주가 왜 중요한지 왼손만 연주하며 깨닫았다. 왼손만 놓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선율이 오른손과 만나 화성을 이루며 음악을 만들어가는 그 과정을 하나 하나 알아가며 쇼팽이라는 작곡가가 왜 대단한지 요즘 다시 생각하고 있다.

발라드 1번을 두고 슈만은 쇼팽을 4곡의 발라드 중에서 제일이라고 평했다. 나도 역시 발라드 1번을 가장 좋아한다. 그러니 이 대곡을 치고 싶다는 욕구에 무모한 발을 들여놓은 것이고.

나는 발라드 1번이 하나의 서사시와 같은 극적인 전개구조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처음 도입부의 담대한 전개는 이 서사시의 1연이다. 서사시에 어울리는 선율과 전개과정. 발라드 1번의 전개과정은 그렇다. 그런측면에서 미켈란젤리가 테스트먼트에서 50년대 녹음한 모노 녹음은 이런 전개과정에 가장 충실하다고 생각한다. 굉장히 엄격한 템포와 뻣뻣하게 느껴지는 선율전개는 오히려 이 곡에 더 어울리지 않나 싶다. 페라이어의 시정이 넘치는 도입부나 완벽주의가 느껴지는 짐머만의 연주도 물론 좋지만…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스필만이 독일군 장교 앞에서 발라드 1번을 연주 한 것도 이런 서사적 구조가 갖는 극적인 면을 고려한 의도적인 선곡이 분명하다. 생사의 기로에서 녹턴을 연주하는 것도 좀 그렇고 그렇다고 폴로네이즈를 연주하는 것은 좀 오버가 아닌가.

담담한 도입부과 절정을 향해서 서서히 치닫는 전개부 화려하고 극적인 절정을 지나 다시 담대하게 마무리 짓는다. 코다를 향해서 맹렬하게 상승하다 담대하게 마무리 짓는 순간. 장렬하다는 느낌이 저절로 든다.

이 곡은 내가 모든 피아노 곡을 통틀어 가장 잘 알 수 밖에 없는 것이 악보는 수 없이 봤고 연주도 몇 번 해보았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위대하신 영도자 전 가카처럼 내가 해봐서 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요즘 악보를 본다는 개념보다는 연구한다는 마음을 갖고 악보를 다시 보고 있으니. 틀린 계이름을 정정하는 것은 기본이고 행간에 숨겨진 작곡가의 악상기호도 유심히 보고 그 의도를 알고 싶어한다.

요즘 레슨을 받으면서 전통이라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전통이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없어지는 것이 아닌 까닭은 그 긴 세월동안 눈과 눈 귀과 귀 그리고 양 팔과 온 몸이 기억하는 삶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배웠던 교수님 그 교수님이 배웠던 교수님. 이렇게 꼬리를 타고 올라가다보면 어느 새 쇼팽이 살던 시대의 쇼팽과 마주하게 된다. 이 생각을 하게 되면 감격이라는 말이 적합한 감정을 체험하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그 미약한 끈을 통해 이 위대한 전통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예술이 사람을 구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예술지상주의를 믿지 않는다. 하지만 예술을 통해서 사람이 구원 받을 힘을 얻는다 믿는다. 스필만이 달빛이 내리는 그 폐허의 전쟁 한 복판에서 발라드 1번을 연주하는 그 순간. 유대인과 독일군의 차이는 사라지고 쇼팽이라는 위대한 전통이 이어주는 두 사람만 남는다. 먹고 사는 것의 위대함만큼이나 예술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

피아노 레슨

다니는 피아노 학원 선생님이 서울의 꽤나 유명한 음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분. 물론 나이는 나 보다 한참은 어리지. 그런데 아무나 수석 졸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 작은 손으로 피아노 치는 것 보면 내 손이 다 부끄러울 지경.

레슨을 일주일에 한 번 받는데 받을 때마다 내가 피아노를 얼마나 못치는지 좌괴감에 빠져든다. 거의 독학으로 피아노를 익혀서 실력이라고 해봤자 뭐 대단한 것도 아니고, 그나마 십수년은 거의 피아노를 쳐보지 못해서 실력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수준. 그래도 악보는 나름 잘 본다고 생각했는데 쇼팽 발라드 1번 레슨을 받으면서 내가 악보에서 얼마나 많은 부분을 놓치고 있는지 많이 배워가는 중. 쇼팽 곡이 임시표도 많고 화성변화가 심해서 악보를 본다는 표현보다는 연구한다는 자세로 봐야 악보를 제대로 볼 수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나 같은 아마추어가 접근하기에는 처음부터 가능한 길이 아닌 듯. 천재라면 모를까.

아무튼 레슨을 받고 알아가는 기쁨도 있는데 레슨을 받고 그만큼 연습해야 하는 고통도 따른다. 연습이 즐거운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마 천재일 것. 연습을 해도 실력이 늘어가는 것이 느껴지지도 보이지도 않으니 이게 업인 사람은 얼마나 힘들까.

엉망진창인 박자감각에 선생님은 처음에는 웃다가 요즘은 경악을 금치 못하시고 계시고, 피아노 연습을 하루에 한 시간은 해야 하는데, 이게 쉽나? 아무튼 피아노를 사기는 쉬운데 연주하기는 피아노 값에 백배를 한 것보다 어렵다.

토요일 번개 후기

1. 커피스트
커피 맛나더군요. 예가체프라면 그 귀족적인 맛이 특징인데 여기 예가체프는 약간 서민스러운 맛이었습니다. 이인희님도 다시 뵙고 장유호님은 처음 뵈었네요. 유호님은 첫인상이나 목소리가 참 좋으시네요 ㅎ

2. 랍스터
아침부터 서두른 일정이라 피곤해서 잘 줄 알았는데, 재미있어서 못잔 영화. 초반부에는 좀 지루한가 싶었는데 점점 몰입하게 되는 영화. 저는 재미있게 봤습니다. ㅎ

3. 7PM
시골 사람 티가 날 수 밖에 없었던 현장. 모든 음식이 다 처음먹어보는 음식. ㅋㅋ 게다가 맛도 아방가르드하게 느껴지고. 참석하신 다른 분들이 맛나게 드시는 것을 보고 새삼 반성도 좀 하게 되었습니다.

수다가 떨다보니 시간이 한도 없이 길어지고, 결국에는 예매한 표를 취소하고 막차타고 내려갔네요. 개들만 아니면 하루 자고 갔을텐데, 개들 밥을 줘야해서 이제 외박은 힘드네요 ㅡ.ㅡ

지적이고 고아한 취향을 지닌 보라, 자타공인 목소리 미녀 숙현누나, 여전히 예쁘신 준주누님, 그리고 정많은 사랑샘.
모두 즐겁게 보냈습니다.
굳이 안그래도 되는데 버스타는 곳까지 배웅해주신 우리 사랑샘님. 언제나 Thank You !

참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다음에 또 만나서 미식에 대한 논의를 이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