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전주곡, 임동혁

어제 집에서 임동혁 쇼팽을 들었다. 임동혁 음악에서 사실 그동안 큰 감흥을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 그라모폰 기사를 읽고 한 번 사봤다. 수입음반을 기다렸는데 라이센스 표지를 임동혁이 직접 골랐다고 해서 라이센스를 구입.

사람마다 음악을 선택하는 기준이 있고, 내 경우는 가장 관심있게 들어보는 것이 음색. 그래서 미켈란젤리를 좋아하는 것도 있고 그 연장선상에 짐머만이 있다. 건반에 대한 완벽한 컨트롤이 빚어내는 그 완벽주의를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피아니스트 대부분이 이 연장선상에 있다. 예술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기교라는 연장을 잘 다룰 줄 아는데서 차별성이 시작된다고 생각하기도 하니.

이 음반을 들으며 내가 왜 임동혁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지 다시 깨닫았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적 방향과 그냥 좀 다른 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임동혁 음반은 굉장히 좋았다. 조성진이 연주하는 엄격한 전주곡 음악과 비교하니 새삼 더 와닿은 것도 있고.

자유롭기 보다 안으로 파고들어갔고 엄격하기보다 자유로워진 것 같다. 이게 뭔 잡소리인가 싶지만 내가 듣기에는 그랬다. 여유롭고 자유로운 루바토속에서도 악보에 충실한 것이 느껴졌고 무엇하나 튀는 구석 없이도 음악이 새로웠다. 아르헤리치보다는 루빈스타인이 떠오른다.

그동안 맘고생이 좀 많았던 것 같은데, 고통이주는 성장통을 잘 이겨낸 모양이다. 누구나 연주하는 이 쇼팽 음악중 이렇게 자신있게 남에게 추천 할 수 있는 음반도 많지 않다. 폴리니나 소콜로프 같은 초인적인 연주와 견주어도 부끄럽지 않다.

이제 서른 두살의 피아니스트가 쇼팽 전주곡을 이렇게 연주 할 수 있다니… 폴리니가 떠오른다. 방향은 다르지만. 다시 한번 듣고 다시 글을 써보련다.

역사

역사는 한 사람이 잘못한 것을 모든 사람이 물어야 하고, 한 시대의 실패를 다음 시대가 회복할 책임을 지는 것. 그것이 역사다.  <함석헌, 뜻으로 본 역사>

함석헌 선생의 저 말씀이 내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시기다. 저 말씀의 의미가 전달되는 것을 넘어 문자 그대로의 뜻이 전달되는 퇴행된 오늘을 살게 될지 몰랐다. 그 비루한 이명박도 이런 짓거리는 하지 않았으니까. 그는 오직 돈이 삶의 맘몬인 자라 역사 따위의 의미를 주워담기에도 그릇이 작고 천했다. 

이 시대의 잘못은 이 세대가 지지 않고 이 시대가 짊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방관하고 남의 일처럼 생각하지. 무책임한 사람들이다. 후대에게 짐을 짊어주는 부끄러운 조상이 되려하니. 장준하는 스스로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서 죽는 날까지 그렇게 고단한 삶을 살았다. 스스로 부끄러운 조상이 되고 싶어한 일본군 장교는 대통령이 되어 딸같은 아가씨 품에서 총에 맞아 죽었다. 

역사의 큰 물줄기를 말하지 않더라도 사람이라면 부끄러운 줄은 알아야 한다. 최소한의 염치도 없이 사람 행세를 하면서 어찌 사람 대접을 받기 바라는가. 시대의 잘못을 미루는 이는 염치없는 작자이다. 그 염치조차 알 턱이 없는 그런 비루한 자.
부끄러운 조상이 되고 싶지 않고 이 시대의 잘못을 다음 세대에 전가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침묵하지 않겠다. 그리고 참지도 않겠다. 

이제 겨울의 초입

벌써 겨울의 문턱. 삼십대의 시간은 이렇게 빠르구나. 나는 겨울이 싫어. 신록은 잠들고 햇빛마저 힘이 없다. 온세상이 그래. 
겨울은 외롭고 슬픈 계절이다.
그래서 하느님은 봄을 준비하신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