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과 이오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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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둘 사이를 뭐라 정의 내릴 수 있을까. 일반적인 우정이라고 이야기 하기 힘들다. 나이차이는 열살이 넘는다. 열살이라는 나이가 무색한 존경과 신뢰. 생면부지 남남 사이에 이런 우정이 가능한 것을 목격한다.

이오덕은 이 뛰어난 동화작가가 세상에서 묻혀질까봐, 갖고 있는 그 몹쓸 병으로 일찍 죽을까봐 늘 노심초사였다. 권정생에게 보내는 편지에는 그의 병세에 대한 걱정과 조언이 빠지는 날이 없다. 엄마가 아이를 염려하는 마음이다. 오죽하면 이오덕 당신 집 옆에 거처를 마련하고 권정생 선생을 모셔올 생각까지 하였을까.

한 사람의 능력을 알아보는 이오덕의 비범함에 놀라고 그 비범함을 넘어서는 인간애에 더 놀란다. 우정 그 이상의 존경과 애정이 가득한 그들의 관계. 그들이 주고 받은 편지 사이에 놓여진 시대상과 개개인의 관계를 읽다 깨닫게 되는 것이 많다.

서로가 서로의 삶속에서 이처럼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난다면 그 삶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권정생과 이오덕 그들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그것은 세월이 흘러가면 더욱 견고해지는 사실.

자기 전 머리맡에서 이들의 편지를 읽으며 내 마음이 큰 위안을 받는다.

라보엠 4막

3for1 블루레이를 저렴하다는 이유로 구입. 물론 네트렙코라는 이름값을 믿고 산거지. 화질 음질 모든면에서 블루레이와 DVD는 상대가 되지 않는 다는 것을 확인했고 생생한 화질과 음질 덕분에 더욱 극에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

말러 4번에서 확인한 가티의 지휘력을 이번 영상물을 통해서 새삼 확인하게 되었다. 말러 음반에서의 젊은 가티의 모습은 없고 몰라볼 수 밖에 없는 할아버지가 등장을 해서 깜놀. 그러나 가티의 반주가 얼마나 세심하고 유려한지 보면서 감탄을 거듭했다. 짤츠부르크 페스티발의 높은 수준을 확인 할 수 있는 무대도 만족스러웠고 가수들의 가창도 만족스러웠다. 라보엠이 테너에게 어려운 오페라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영상을 통해 보니 소리로만 편히 듣던 이 오페라가 테너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요구하는지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다 만족스러운 무대였지만, 테너가 그중에서 좀 쳐지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다. 네트렙코는 피가로의 결혼에서 보여주던 그 빛나는 외모가 갑자기 통통해 결코 죽지 않은 것 같은 얼굴로 돌아와서 상당히 당황 ㅋㅋ. 네트렙코의 미모가 대단했다는 사실을 피가로를 보지 않았다면 나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피가로에서 네트렙코는 근접 촬영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그런 무결점의 미인. 영화배우가 부럽지 않다. 라보엠에서는 살이 왜 그렇게 쪘을까.

어제 4막의 도입부에서 재생을 멈췄다. 마음의 준비를 하고 봐야 할 것 같아서. 소리로만 듣는 오페라도 완벽한 음악이다. 그 소리가 주는 향연이 얼마나 달콤하면 무대 음악음악임에도 감동을 받겠는가. 그런데 무대음악을 무대와 함께 감상 할 경우, 소외당했던 눈이 눈을 뜨게 된다. 눈과 귀가 서로 통하는 그 순간 감동은 이전과 다른 밀도로 다가온다. 라보엠이 좋은 음악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라보엠을 듣고 가슴 저미는 감정을 느껴본 적은 없었다. 눈과 귀로 보고 듣는 라보엠은 사랑의 기쁨과 슬픔이 얼마나 우리의 마음에 다가서는지 알려준다. 기쁨에 웃고 슬픔에 운다.

4막을 앞두고 멈춘 이유는 슬픔을 향해 돌진하는 이 마지막 장을 볼 감정을 남겨두기 위해서다. 4막에서는 사랑이 슬픔으로 모두 타 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사랑은 기쁨보다 슬픔이고, 슬픔으로 마음에 새겨진다. 4막에서 루돌프와 미미의 사랑도 끝이 날 것이다. 그 끝은 분명하고 감정도 분명하다. 단단히 준비를 하고 봐야 하는 것. 또 얼마나 처절한 사랑의 슬픔을 노래할까. 사랑을 얻을 때보다 잃어버릴 때 강렬하고 심장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새긴다.

 

더위

여름이 절정을 향해서 맹렬히 돌진하는 시기
생각의 방향과 길이는 그 길을 잃어버린다.
추위는 정신이라도 또렷하게 만들어주는데,
더위는 그렇지 못하다.
게다가 이 더위끝에는 가을이라는 지독한 계절이 기다리고 있다.
반복되는 일상속에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하루의 기록을 남기는 습관마저 무디어져 간다.
혼자라는 외로움이 때때로 칼날처럼 날카롭게 다가오지만,
혼자라는 외로움이 주는 그 익숙함속에서
나는 혼자라는 하루의 만찬을 즐긴다.
시류에 시달리지 않고 나의 길을 나 스스로 개척하겠노라고 다짐했지만,
시류를 거스를 용기라는 것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고,
그런 삶은 아무나 살 수 있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요즘의 나를 보며 깨닫는다.
이전의 나와 요즘은 나는 달라도 많이 다른, 그래서 가끔 나도 당혹스러운 그런 모습이다.
권정생은 가난했던 그 시절 돈 오천원만 보내줄 수 없냐는 편지속에서도
평생을 아이들과 함께 가난하게 살겠다고 다짐한다.
돈 오천원이라는 구걸아닌 구걸에 자존심 자존감 이런 것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비참한 삶속에서도 그는 가난을 받아들이고
그런 것들을 초월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는 위대한 정신이고 혁명가이다.
나는 권정생이야 말로 기독교 정신의 한 가운데 살아온 삶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 신자로서 그를 존경하는 한 사람으로서
그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내가 부끄럽다.
이런 모습으로 그의 고귀한 삶을 읽는 다는 것도 부끄러울 때가 많다.
이 무더운 여름날
온 생명이 그 빛나는 생명력을 더해가는데,
나의 생각의 폭과 깊이는 담을 쌓아간다.
생각마저 이렇게 자유롭지 못하면서
어떻게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