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을 읽다

조지 오웰의 수필집 나는 왜 쓰는가를 읽었다. 수필이라는 것이 소설과 달리 개인의 내밀한 직접적 독백이기 때문에  코드가 맞으면 쉽게 감응하는 법인데 오웰의 수필은 처음부터 나에게 오는 길이 덜컹거렸다. 왜 그랬을까 생각해보니 제국주의 시대 오웰의 눈으로 바라본 영국의 시대상에 나에게 참 낯설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읽어나가면서 내게 다가오는 오웰의 이야기는 새로운 세상을 만났을 때 느끼는 그 설레움을 가져다 주었다.

그간 나의 세계관은 생태주의에 기울어 그쪽에 관련된 책들만 주로 편식해 온 것이 사실이다. 이쪽 책을 읽으면 참 편하지. 왜냐면 나는 이미 그쪽 세계에 발을 내딘 사람이니까. 법정 스님의 책을 읽으며 다가온 그 스산한 감동은 이런 연유일 것이다.

그런데 오웰의 세계는 달랐다. 아니 다르다는 표현으로는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아직 다 읽지 못해서 정확하게 표현하지는 못하겠다. 오웰의 세계는 책 한두권을 읽는다고 알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동물농장이나 1984의 작가로만 오웰을 알았다니… 요즘 밤에 오웰의 글을 읽는 재미가 얼마나 큰지 모르겠다. 오웰을 읽으며 제국주의 시대로 돌아간다. 그때와 지금이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고 한 시대를 깨어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삶인지, 다른 의미로 불행한 삶인지 생각하게 된다. 시대를 깨어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이튼을 졸업하고도 식민지 버마의 경찰로 자원하였다. 이튼 출신 최초. 그 죄책감으로 런던에서 노숙자 생활도 했다. 이후 작가로서의 삶도 순탄하지 못했다. 건강하지 못했고 짧은 생애를 마쳤다. 하지만 누구보다 빛난 삶이었다. 한동안 오웰 앓이를 할 것 같다…

나는 바람이 아니지

바람이 부는 곳은 어디일까. 그 기원도 끝도 알 수 없는 바람. 나는 이 바람에 대한 동경이 있다. 습관적으로 튀어나오는 말도 바람. 그래. 그렇게 난 바람을 닮고 싶었다. 보이지 않지만 맨살에 닿아야 그 존재를 느낄 수 있고, 나무가지를 흔드는 그 손길에 그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바람은 무형으로 유형을 만들어 세상을 움직이는 숨결이다. 그렇지 어머니 지구의 숨결.

바람을 보려면 숲으로 가야 한다. 이왕이면 대숲이면 더 좋지. 거기서는 바람의 노래까지 들을 수 있으니까. 답답한 사무실에서는 더욱 바람을 닮고 싶다. 창밖의 은행나무를 흔드는 저 바람. 시인은 잔가지를 지날 때 바람이 많은 상처를 입는다며, 바람의 상처까지 걱정했다. 그런 감수성과 상상력이 있으니 시인이 될 수 있었던거지.

시작도 끝도 없는 그 바람의 자유로움이 좋다. 시작도 끝도 없으니 바람은 오직 지금 뿐이다. 그래서 지금 내 살갗에 와 닿는 이 바람은, 영원의 전달자.

피곤

그제 어제 얼마나 피곤했는지 씻지도 않고 양치도 안하고 잤다. 잠깐만 자려고 누웠는데 일어나보니 아침. 뭐때문에 그리 피곤했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 아니어서 활동반경을 최소한 줄여야 하는데, 좀 싸돌아다녀서 그런 듯.

어제 회사 전직원 회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초상집. 국민은행 5500명 희망퇴직 뉴스를 보니 저금리의 여파가 얼마나 대단한지 피부에 와 닿는다. 회사만 믿고 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도 새삼 깨닫게 되고. 이 비열한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수단을 강구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