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예를 들어 그 시절의 나에 대한 평가. 언제나 현재의 나는 혼란과 불안으로 가득차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나아간다. 누구를 만나 사랑하고 인생의 커다란 문제 앞에, 사사롭게는 내가 이 주식을 사야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혼란과 불안이 걷히고 비로소 나는 제대로 된 시각으로 그때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살아있다는 것의 가치를 부여하는 일이기도 하고 지금의 내가 살아가는 것의 의미이기도 하다.

삶에는 언제나 현재뿐이다. 시인의 말처럼 미래는 더디오고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있으니. 시간이 지나고 나서의 내 모습은 그래서 현재뿐. 지금 내가 제대로 볼 수 있는 건 과거의 일. 왜냐면 과거는 영원히 정지해있으니. 볼 수 있는 우리의 시간은 언제나 과거뿐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고 객관적일 수 있는 건 과거에 대한 현재의 나의 태도. 현재는 더디오는 미래처럼 불확실 할 뿐이다.

지금의 나는 더디오는 저 미래의 나에게 어떤 모습일까… 늘 고민하지만 끝이 없다.
π (파이)처럼 말이다.

씨알의 소리는 오늘의 팔락거리는 등잔입니다

씨알의 소리는 오늘의 팔락거리는 등잔입니다. 모진 바람 불고 사나운 짐승 날뛰는 어두운 골짝에 초막 하나를 지켜가는 것은 결코 큰 돈이라 권력이 아닙니다. 호롱불 하나 때문입니다. 씨알 여러분! 여러분의 기도로 이 시대의 호롱에 기름을 대십시오. 겨울이 오고 있습니다. 이 등잔을 꺼서는 아니됩니다. – 날고도 새로운 계명 씨알의 소리 1975. 9

40년이 지난 지금에 읽어도 마음에 와 닿는 것은
이 사회가 40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답답한 현실인 거지.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권리는 어른이 누리고
그 책임은 아이들이 짊어진다.
염치없는 어른들의 사회.

짧은 생각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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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성장 저출산으로 대표되는 시대의 위기감. 모두가 각자도생[各自圖生]의 길을 헤메는 이때에. 정치는 정지해 있고 통치는 혼을 찾고 있다. 토머스 하디 그의 시 ‘뭇나라의 괴멸’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우리네 삶은 이어진다고 노래한다. 문제는 그 삶이 단지 이어질 뿐이라는 거지. 어떻게 살든. 사회의 부는 크게 늘어났지만 가난이 화두인 이상한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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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 탈당 할 것같은 기개는 사라지고 시민의 뜻을 묻는단다. 누구냐고, 내가 사는 곳 정읍 국회의원이라는 분의 말씀이다. 이 지역의 기개가 이 정도밖에 안되었나… 쯧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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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일 신문을 보니 문재인, 안철수 양비론이 도배를 한다. 허허. 떼 쓴놈이 대접받는 세상이다. 호남의 민심이 안철수라면 이 지역도 별수 없는거지. 그냥 정신승리에 만족하는 거. 광주의 아들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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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하고 집에 오면 피곤하다. 무조건 피곤. 업무강도가 센 것도 아닌데, 회사만 가면 일이 많아도 없어도 피곤. 지쳐 퇴근하면 집에서는 손가락도 움직이기가 싫다. 그래서 티비 채널도 잘 안바꾼다. 그러더 거실서 잠들고… 도무지 뭘 해야 하는데 기운이 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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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잠을 자는 약을 발명한다면 그는 노벨평화상을 받을 것이다. 북반구의 인류가 겨울 3개월 동안 사라진다면 세상은 분명 나아질 것이다. 그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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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예전에 치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1,3번을 다시 치기 시작했다. 인터넷의 세상이 열리니 못구하는 악보가 없다. 3번은 그 유명한 달빛, 베토벤의 달빛은 피아노가 흐느끼며 우는 느낌이고 드뷔시의 달빛은 한여름 밤의 몽환적인 분위기. 이 곡을 참 좋아한다. 난이도도 그렇게 높은 곡은 아닌데, 표제와 다른 음악이 나와서 당황스럽다. 표제는 달빛인데 표현은 황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