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프라하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활하던 드보르작은 뉴욕 음악원을 설립한 여류 백만장자 자네트 더버 부인으로부터 한 가지 제안을 받게 되었다. 연봉 3만 굴덴을 내놓을테니 뉴욕 음악원에서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당시 프라하 음악원에서 받고 있던 연봉이 1천 2백 굴덴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결코 뿌리칠 수 없는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드보르작은 곧바로 프라하 음악원에 휴가 신청을 내고 아내와 두 아이, 그리고 그의 조수 요제프 얀 코바르지크를 데리고 대서양을 건넜다.

드보르작은 곧 이 낯선 신대륙에 강하게 끌리기 시작했다. 활기찬 대도시와 웅장한 대자연은 그에게 압도적인 인상을 남겨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가 샘솟기 시작했다. 드디어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와 현악 4중주 제12번 ‘아메리카’ 등의 걸작들을 탄생시킨 드보르작의 아메리카 시대가 열린 것이다.

주로 뉴욕 동부 17번가에 머물며 근처에 있는 음악원에서 작곡 강의를 하며 지내고 있던 드보르작은 1893년 여름에는 아이오아주의 스필빌에서 휴가를 보내게 되었다. 보헤미아에 남아있던 가족들도 모두 함께 미국으로 건너와서 함께 보내는 첫 휴가였던 만큼, 이 시기의 드보르작은 무척 행복한 기분으로 작곡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때 탄생한 작품이 바로 현악 4중주를 제12번 ‘아메리카’였다. 당시 드보르작이 현악 4중주 ‘아메리카’를 작곡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던 코바르지크는, 정신없이 작곡에 몰두하던 드보르작의 모습을 이렇게 회고했다.

“1893년 6월 5일의 찬란한 날, 드보르작은 이 작은 마을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가 이 마을의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 마을의 경치를 보면서 그의 조국과 고향을 떠올렸던 것 같다. 그는 이 마을에 자리를 잡자마자 곧바로 그의 천재성을 발휘할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 도착한지 사흘이 지난 6월 8일에 벌써 그의 새 작품 현악 4중주 F장조의 1악장에 착수했다. 그 다음 날 아침 1악장이 완성되자 그는 곧 2악장을 쓰기 시작했고 저녁에는 3악장을 써내려 갔다. 그 다음 날에는 4악장을 작곡했고, 10일에는 마침내 현악 4중주 전곡이 완성되었다. 그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워하며 악보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렇게 써넣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렇게 빨리 끝낼 수 있게되어 저는 정말 만족스럽습니다.’ ”

마치 이미 완성된 형태로 머리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던 음악을 그대로 쏟아내듯, 드보르작은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현악 4중주 F장조 ‘아메리카’를 완성했다. 드보르작이 현악 4중주 제12번 ‘아메리카’의 초고를 완성하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사흘이었다. 폭발적인 창조력의 분출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놀라운 일이다. 초고를 완성하자마자 곧바로 정서에 들어간 드보르작은 6월 23일에 파트보를 비롯한 완벽한 스코어를 완성했다. 작곡을 시작한지 보름만에 모든 작업이 완전히 끝난 것이다. 스코어를 완성하자마자 빨리 이 음악을 직접 귀로 확인하고 싶었던 드보르작은 코바르지크와 그의 자녀들과 함께 직접 제1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다.

그 당시 드보르작을 고무시켰던 이 놀라운 음악적 영감은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매일 아침 산책을 즐겼던 드보르작의 모습을 묘사한 코바르지크의 기록을 읽어보면, 당시 드보르작이 머물고 있던 스필빌의 뛰어난 자연 경관이 그에게 큰 음악적 감흥을 불러일으켰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는 자연을 사랑하는 아주 순박한 사람이었습니다. 스필빌에 머무르는 동안 매일 아침 작은 숲을 지나 강가를 산책하는 것은 그의 중요한 일과였습니다. 그는 특히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좋아했지요. 그는 여기 온 첫날에도 산책을 했는데, 그때 빨간 깃털에 새까만 날개를 단 아주 특이한 새를 발견하고는 무척 유심히 살피는 듯 했습니다. 그 새는 울음소리도 아주 독특해서 그는 그 소리에 영감을 받아 현악 사중주 3악장의 주제로 삼기도 했습니다.”

숲 속의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려 부스럭거리는 듯한 떨림으로 시작되는 1악장의 도입부를 들어보면, 이 작품이 자연의 영감을 받아 탄생한 것임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스필빌의 아름다운 숲과 강,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작곡가 자신의 감흥이 그대로 배어있는 듯, 음악은 무척 편안하고 평화롭다. 이 부스럭거리는 트레몰로 음형은 전 악장에 걸쳐 약간씩 변형된 형태로 이 음악의 바탕을 이루며 스필빌의 상쾌한 아침 산책로를 연상시킨다.

매혹적인 1악장에 이어 느린 2악장에는 고향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이 배어있다. 깊고 풍부한 감정 표현, 솟구쳐 오르는 듯한 음형, 고음역에서 찬란한 빛을 방사하는 첼로의 매혹적인 음색. 누구든 한 번 듣기 시작하면 깊이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음악이다. 같은 신대륙에서의 체험을 담은 까닭인지, ‘아메리카’ 4중주의 2악장은 드보르작의 ‘신세계’ 교향곡의 2악장과도 그 분위기가 매우 비슷하다.

3악장 스케르초는 드보르작이 작곡한 음악 중에서 가장 유머러스한 음악으로, ‘스케르초’(Scherzo), 즉 ‘농담‘이라는 말을 음악적으로 그대로 표현한 듯하다. 과장된 악센트와 다이내믹, 강박의 위치를 바꿔버리는 독특한 리듬, 그리고 드보르작이 산책로에서 발견했다는 이상한 새의 울음소리가 바이올린의 높은 멜로디로 연주되어 더욱 밝고 재미있는 인상을 준다.

4악장은 무척 활기차고 명랑한 음악이지만 중간에 스필빌에 있는 교회오르간의 코랄 선율을 모방한 조용한 악구가 등장하기도 한다. 작은 교회에서 조용히 울려 퍼졌던 코랄 선율과 경쾌한 부점 리듬으로 된 경쾌한 멜로디를 하나의 음악으로 엮어낼 수 있었던 드보르작의 탁월한 감각은 놀라울 따름이다.

‘아메리카’라는 부제에서 암시되듯, 드보르작의 현악 4중주 제12번은 미국의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음악과 흑인 영가에 강한 영향을 받고 있다. 그러나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드보르작 자신이 명명한 것은 아니다. 그가 자필 악보의 표지에 ‘아메리카에서 작곡한 두 번째 작품, 현악 4중주 F장조’라고 쓴 것을 보고 후세 사람들이 ‘아메리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부제와는 별도로 이 작품에는 ‘흑인’을 가리키는 ‘니거’(Nigger)라는 별명이 붙어있는데, 그것은 이 작품에 5음 음계를 기초로 한 흑인 영가 풍의 멜로디가 많아 이국적이면서도 민요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드보르작은 뉴욕 음악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당시 특히 흑인 학생들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였으며, 흑인 영가의 편곡자이자 가수인 해리 사커 바레이를 집으로 초대해 흑인 노래를 듣기도 했다고 전해지는데, 흑인 영가에 대한 드보르작의 이러한 관심은 그의 작품에 그대로 반영되어 아메리카 시기에 작곡한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와 현악 4중주 제12번 ‘아메리카’에서 독특한 색채를 부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드보르작은 실제로 흑인 영가나 인디언의 민요를 작품에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았고, 다만 아메리카 민속 음악의 관용적인 음악 어법만을 받아들여 5음 음계와 부점 리듬, 그리고 싱코페이션을 사용한 고유의 멜로디를 만들어냈다. 또 그의 선율은 그의 고향인 체코의 민속 음악과도 교묘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독창적이다. 그가 사용한 음계를 자세히 검토해보면 북부 인디언들의 음악에 자주 나타나는 5음 음계에다가, 일곱 번째 음을 반음 낮추는 체코 민속 음악의 독특한 단음계를 결합시켜 좀 더 복합적인 성격을 띤 음악으로 재창조했음을 알 수 있다.

‘아메리카’ 4중주곡은 드보르작이 남긴 현악 4중주곡들 가운데서 3악장만으로 된 제4번 e단조와 더불어 가장 짧은 현악 4중주곡이다. 그 때문일까? 그 형식과 내용은 빈틈없는 구조로 꽉 짜여져 있으며 흐름이 무척 자연스럽고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없다. 게다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선율과 경쾌한 리듬까지 갖추고 있어서 클래식 음악 입문 곡으로 빠짐 없이 추천되고 있으며, 현악 4중주의 필수 레퍼토리로 자리 잡고 있다. 실내악을 어렵고 심오한 것으로 생각했던 사람이라도 드보르작의 현악 4중주 ‘아메리카’를 들어본다면 실내악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될 것이다.

* 드보르작 현악 4중주곡 제12번 ‘아메리카’ 2악장 심층 분석

– 알반 베르크 현악 4중주단  EMI  CDC 7 54215 2 (1991)

자유로운 론도 형식의 4악장은 전 악장 중에서도 가장 밝고 화려하다. 튀어 오르는 듯한 주제가 경쾌한 부점 리듬을 타고 흐르며 발랄한 느낌을 주는 음악이다. 그러나 중간중간 템포 변화가 잦고 음악적 성격도 다양해서 설득력 있게 연주하기가 쉽지 않다.

알반 베르크 현악 4중주단은 마치 현악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듯한 폭발적인 사운드와 탄력있는 리듬감, 그리고 섬세한 표현력으로 ‘아메리카’ 4중주의 피날레를 변화무쌍하게 연주해내고 있다. 실황 녹음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흥분과 격양된 분위기까지 더해져 음악에 더욱 활기가 감돈다.

악보에 추천된 템포는 4분 음표를 메트로놈 152이지만, 알반 베르크 4중주단의 템포는 이보다 더 빨라서 한층 더 생기 발랄하다. 도입부는 상대적으로 잔잔하게 시작되지만, 점차 큰 음량으로 바뀌고 무거운 스포르찬도가 이어지면서 드라마틱한 느낌을 준다. 곧 처음의 가벼운 템포로 되돌아오면 바이올린이 론도 주제(0:24)를 연주한다. 전반적으로 가볍게 처리된 론도 주제에 비해 69마디부터 시작되는 부주제는(0:49) 잦은 음량 변화와 끈끈한 비브라토가 사용돼 무척 관능적이다. 부주제로부터 다시 론도 주제가 등장하기까지의 급격한 크레셴도와 불협화음은 좀 더 무겁고 강렬하게 표현되지만, 막상 론도 주제가 재현되면(1:31) 처음의 가벼운 분위기로 전환된다.

론도 주제에 이어 155마디에서부터는 갑자기 조용한 악구가 연주되기 시작하는데(1:56) 이 선율이 바로 드보르작이 교회의 작은 오르간 소리라고 말했던 선율이다. 혹자는 이 악구에서 ‘드보르작이 스필빌에 있는 바츨라프 교회의 작은 오르간으로 즉흥 연주를 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고 표현하기도 했는데, 밝고 가벼운 음악 사이에 잠시 끼여든 이 고요한 부분은 아주 묘한 느낌을 준다.

곧 이어 메노 모소(속도를 줄여서)로 들어서면(2:15) 바이올린이 약간의 애수를 띤 풍부한 선율을 연주하는데, 여기서 알반 베르크 4중주단의 제1 바이올린 주자는 다이내믹의 표현 범위를 넓힌 풍요로운 음색으로 이 선율의 느낌을 충분히 살려내고 있으며, 바이올린에 응답하는 첼로는 표현의 범위를 한층 더 확대해서 론도 주제가 재현되기 전의 긴장감을 배가시킨다.

피유 모소(빠른 속도로)로 템포가 바뀌고 나서(2:51)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익숙한 론도 주제가 등장한다(3;00). 그러나 론도 주제에 이어 연주되는 부주제가 이번에는 느린 템포로 낮은 음역에서 연주되어 처음과는 그 느낌이 아주 다르다. 이 부분에서 알반 베르크 4중주단은 유난히 내성을 강화해서 풍부한 느낌을 주고 196-7마디(3:52)에서의 첼로 선율의 강조하여 미묘한 뉘앙스를 연출해낸다. 310마디부터 시작되는 코다(4:04)에서 알반 베르크 4중주단은 오케스트라 못지 않은 강렬한 에너지를 폭발시켜 불꽃이 튀는 듯한 화려한 피날레를 장식한다. 바이올린의 활약도 크지만, 비올라의 열정적인 연주와 첼로의 육중한 저음이 무척 인상적이다.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마지막을 향해 달려나가는 그들의 놀라운 추진력과 탁월한 앙상블 능력은 드보르작의 ‘아메리카’ 4중주의 참 맛을 전달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 Q & A 

언제 초연되었나?  1894년 1월 1일 보스턴에서 초연되었다.

초연 당시 연주를 맡았던 4중주단은?  바이올리니스트 프란츠 크나이젤이 리더를 맡았던 크나이젤 4중주단.

‘아메리카’ 4중주곡과 비슷한 시기에 작곡되어 이 작품의 자매작이라고 할 수 있는 드보르작의 실내악곡은?  드보르작의 현악 5중주 E장조 작품 97. 드보르작은 ‘아메리카’ 4중주곡을 완성한 직후에 곧바로 이 작품을 완성했다.

이 작품에 ‘니거’라는 다른 별명이 붙게된 까닭은?  이 작품에 흑인 영가와 비슷한 선율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보르작은 실제 흑인 영가의 멜로디를 이 작품에 그대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글 : 최은규 (바이올리니스트/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