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레퀴엠 자필 악보 – Hostias 마지막 페이지…
요즘 몇일간 계속해서 귓가에서 모차르트 레퀴엠이 울려퍼지고 있다. 전곡이 울려퍼지는 것이 아니라 특정 부분만 반복되어 내 귓가에서 재생되고있다.얼마전 형들과 모차르트 레퀴엠 판본 문제로 격론을 벌인 적이 있었는데, 덕분에 고집불통이라는 불명예는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지만 모차르트 판본에 대한 나름 심도있는 이해가 가능하게되었다.
하지만 휴유증이 남아 발굴된 모차르트 아멘 푸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레빈판본의 아멘이 귓가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처음 듣는 순간부터 이건 기존의 모차르트 레퀴엠과 전혀 다른 새로운 곡이였다. 쥐스마이어판본의 직접적인 감정의 분출이 아닌, 약간은 모차르트적인 선율이 더해진 새로운 곡이였다. 반주부의 비극적인 경향도 상당부분 깍아내려졌다. 물론 레빈 판본또한 상당부분 쥐스마이어 판본에 의지하고 있지만 누구나 쉽게 그 차이를 구별해낼만큼 상당한 차이가 있다. 쥐스마이어 판본에 의지한 것은 큰 차이가 아니겠지만 레빈은 쥐스마이어 판본의 상당부분을 수정해 나름 독자적인 모차르트 레퀴엠을 완성해내었다. 내가 접한 레빈판본의 모차르트 레퀴엠은 곡 자체의 완성도는 크게 흠잡을 곳 없었지만, 모차르트 작품답지 않은 이 작품의 전체적인 분위기에 비교하면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였다. 게다가 연주 자체의 완성도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크리스티의 곡에 비하면 떨어지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레빈 판본의 출발은 쥐스마이어 판본 자체의 오류 즉, 보다 온전한 모차르트 음악을 구현하려는 시도가 아닌가 생각한다. 모차르트가 유언처럼 남긴 아멘 푸가 스케치를 기반으로 새로운 판본을 만들어낸 레빈의 의도는 분명 보다 온전한 모차르트 접근이다. 이러한 시도는 칭찬받아 마땅하고 분명한 개작의 이유가 될 것이다. 판본의 차이에 의한 음악적 호불호는 가려지겠지만, 새로운 판본을 알게됨으로서 모차르트 레퀴엠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레빈 판본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레빈판본과 쥐스마이어 판본의 차이를 이해하면서 모차르트가 구현하려고 하려고 하였던 레퀴엠이 어렴풋이 머리속에서 가닥이 잡힌다. 영원히 불완전일수 밖에 없는 모차르트 레퀴엠… 최고의 천재라는 모차르트가 완성하지 못하였기에 이 작품은 영원히 미완성이며, 때문에 새로운 시도들이 끊임없이 시도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쥐스마이어판본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으며 쥐스마이어의 업적에 대해서 윌리엄 크리스티의 말을 가장 공감하고있다. 어찌되었든 모차르트의 마지막 미완성 유작에 생명을 불어넣은 것은 모차르트 다음이 쥐스마이어의 몫이고 그는 모차르트라는 거대한 압박감을 이겨내고 자신의 능력을 100% 이상 발휘하였다는 것이 내 기본적인 생각이다. 이름도 없는 무명의 작곡가가 서양음악사에서 최고의 천재 작곡가로 손 꼽히는 모차르트의 작품을 마무리한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은 일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쥐스마이어의 마무리는 정교하지 못하였지만 나름의 충실한 효과를 가져왔다. 모차르트 아멘푸가가 발견되면서 쥐스마이어의 아멘처리가 도마위에 올랐지만, 쥐스마이어의 아멘처리는 모차르트 레퀴엠이 가진 비극적 분위기를 최대한 고양시키며 대단히 극적인 효과를 연출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겠지만 내 개인적인 의견에는 그것이 모차르트에 100% 가까이 다가서지는 못하였지만 지금까지의 시도중에서는 가장 모차르트에 근접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다. 모차르트가 남긴 빈약한 아멘 푸가 스케치로는 어짜피 온전하 곡 자체의 구성이 불가능하다.
평소 모차르트 곡들을 들을 때마다 느껴지는 장조에서 느껴지는 단조의 비애감… 그래서 모차르트의 곡은 묘한 매력이있다. 밝은 것 같지마 그안에 내재된 슬픔… 하지만 레퀴엠만큼은 달랐다. 감정의 직설적인 표출이 바로 그것이다. 곡 전체를 관통하는 비애감 그리고 분노 용서… 이전의 모차르트 작업에서 볼 수 없었던 면모들이다. 모차르트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죽음을 예견했다는 일화를 거론하지 않아도 이 작품은 모차르트가 죽음을 문앞에 두고 작곡한 모차르트 최후의 걸작이다. 꺼져가는 마지막 생명의 불빛을 발하며 오선지를 채워갔지만 하느님은 그에게 코다를 끝내 허락하지 않으셨다. 천의무봉처럼 완벽하다는 모차르트의 곡들… 하지만 레퀴엠만큼은 다른 곡들과 달랐다. 음악적인 완벽함에도 불구하고 인간 모차르트는 참 많은 약점을 지니고 살았고 레퀴엠이 미완성으로 끝나면서 모차르트 음악도 인간 모차르트를 닮아갔다. 신은 모차르트를 통해서 인간의 불완전성을 충고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쥐스마이어는 이런 모차르트에 비할 수 없는 작곡가였다. 때문에 그가 이 곡을 완성하였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연주가 불가능한 몇몇 오류들 때문에 쥐스마이어는 그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도 종종 폄하를 받을 때가 있다. 하지만 인간 쥐스마이어는 천상의 음악과도 같은 모차르트의 곡을 완성시킨 유일한 사람이였다. 그는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소모하였다. 여기서 음악적인 완성도를 떠나 모차르트의 대업을 완성한 그의 작업의 가치가 시작한다. 과정이 어찌되었든 모차르트의 이 대작을 완성시킨 면류관을 쓸 사람은 오직 쥐스마이어뿐이다. 브람스가 다시 살아온다고 해도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완성할 수 없다. 브람스는 근본적으로 모차르트와 다른 음악적 세계를 소유한 사람이기때문이다. 쥐스마이어가 평범하였기에 오히려 색깔이 없었고, 덕분에 모차르트를 모방하여 곡을 완성하려하였고, 그것이 긍적적인 결과로 나타난 것이 아닐까… 게다가 그는 모차르트의 제자였고, 모차르트와 마지막을 함께 하였다. 그가 모차르트의 음악적 지시를 받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음반은 쥐스마이어 판본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여전히 쥐스마이어 판본은 가장 많이 사용되는 판본이며 바이어 판본은 쥐스마이어판본의 오류를 수정했다는 성격이 강한 판본이다. 이 정도 결과라면 쥐스마이어도 지하에서 기뻐할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모차르트 레퀴엠 음반은 윌리엄 크리스티의 음반이다. 발터나 뵘의 음반들도 물론 좋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크리스티의 음반에 비할 바가 아니다. 크리스티는 쥐스마이어 판본의 가치를 아주 높게 평가하였고, 연주또한 그에 비할만한 괄목할 성과를 이루어내었다. 합창이나 반주의 완성도를 따지지 않겠다. 그건 이미 기본이며 크리스티는 이전 시대의 묵직한 레퀴엠들과 달리 모차르트의 이곡에 역동성을 불어넣었다. 그 결과 이 곡은 이전 보다 더욱 인간적 감성에 호소하며 또한 모차르트의 곡이 가진 천국의 성격을 살려내었다. 크리스티의 레퀴엠에서 비로서 천상의 선율이 가진 인간적 슬픔이 아니라, 인간적 슬픔이 가진 천상의 선율을 구현해 낸 것이다. 이는 크리스티 레퀴엠 음반이 가진 미덕들의 결과이다.
크리스티 레퀴엠은 우선 우리가 투티라고 말하는 총주가 투명하다. 거기에 각 악기들의 특성이 재대로 살아있다. 그 결과는 이 음악의 극적인 효과가 더욱 부각되었으면서도 품격을 잃지않았다. 템포와 강약의 조절또한 칭찬받아야할 부분이다. 음악적인 긴강감을 잃지 않게하는 크리스티의 템포감각과 강약조절은 이 음악이 백미이다. 쥐었다 놓았다 하면서 곡의 긴강감을 끝까지 유지하는 이 음반은 내게 있어서 레퀴엠의 마약과 같다. 덕분에 다른 음반들을 들으면 지루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크리스티는 이 음반을 녹음하면서 쥐스마이어의 작업에 비하면 자신의 이 작업은 비할바 없는 초라한 작업이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쥐스마이어의 작업에 크리스티는 날개를 달아주었다는 생각이다.^^
바이어 판본 – 번스타인 / 쥐스마이어 판본과 큰 차이 없음
몬더 판본 – 호그우드 / 가장 반(anti)-쥐스마이어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판본.
레빈 판본 – 라바디 / 판본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켜준 문제의 음반
쥐스마이어 판본 – 헤레베헤가 수정하였다고 하나 쥐스마이어 판본임.
모차르트 초고판 – 슈페링 / 모차르트가 직접 완성한 부분만 연주한 음반.
쥐스마이어 판본 – 크리스티 / 가장 좋아하는 음반 (강력하게 추천…)
지금은 판본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쥐스마이어 판본이 최선이라는 생각이다.
다만 그것이 모차르트가 생각하던 음악이었는지는 별도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