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수 사람들이 한글 전용에 반감을 갖고 있고, 한자를 모르면 마치 전통문화를 잊어버리는 것처럼 호도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아직까지 남아있는 사대주의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첫째, 한자를 아는 것과 한문을 아는 것은 다르다. 한자를 알면 한문을 이해하는데 도움은 되겠지만, 한자를 안다고 한문을 이해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자문화권인 동북아시아에서 한자를 아는 것이 모르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점차 동북아 3국의 한자 모양세가 달라지는 현실을 비추어 이것이 언제까지 경쟁력을 지닐지 의문이다. 참고로 유엔에서도 정자체 사용은 페지되었고, 유엔에서 사용되는 모든 중국어는 간자체 한자로만 표기된다. 중국식 간자체를 보신 분은 알겠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정자체와는 확연히 다른 모양세를 지니고 있다.
둘째, 전통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유,무형의 자산을 동시에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있다. 그런데 한자를 모르면 전통문화를 모른다는 우려는 유형의 자산, 그중에서도 기록문화에 대한 지극한 편견이며, 속단이다. 기록문화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유,무형의 문화들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기록문화를 이해해 전통문화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자교육보다 올바른 번역본이 보급되는 것이 100번 효과적이다. 이점에서 한자교육에 투입되는 과도한 비용을 번역사업으로 투자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고 전통문화의 이해,발전에 더욱 기여하리가 확신한다.
셋째, 모든 사람들이 한자를 알아야할 필요성이 과연 존재하는가? 언어라는 것은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따라서 언어를 기록하는 문자또한 당연히 목적이 아닌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국 언어나 문자는 필요성에 의해서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국제어인 영어의 사용이 필수가 되어가는 것도 바로 그 필요성때문이다. 한자가 필요하다면 필요로 하는 사람이 배우고 사용하면 된다. 모든 국민이 고전을 술술 읽어내려가는 것은 절대불가능한 일일 뿐더러 그만큼의 기회비용을 지불할 가치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원문이 필요한 사람은 그것을 읽을 능력을 갖추면 되는 것이고, 좋은 번역들이 많아진다면 그 필요성 또한 자연히 감소하게 될 것이다. 철학자 에머슨은 이런 말을 남겼다. ” 번역본을 놓아두고 원어를 읽는 것은 다리를 놓아두고 수영으로 강을 건너는 것과 똑같다. ”
넷째, 한자가 없으면 과연 우리의 말글살이는 혼란을 겪게되는 것일까? 이 주장은 일단 약간의 정당성을 지니고 있다. 국어의 70%를 차지하는 한자가 없다면 그것이 병행되지 않는다면 문자생활에 약간이 불편함을 분명 존재할 것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것은 약간의 예일 뿐이다. 우리가 한글을 사용해서 말글살이 하는데 있어서 한자를 사용하지 않아서 생기는 불편함을 피부에 와닿게 느끼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한글전용의 원칙에서도 이점에서는 의미의 이해가 모호한 경우,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경우에는 한자병기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과도기적인 예외법칙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과도기적인 상황을 거쳐 완전한 한글전용이 지극히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한자를 사용하지 않아서 불편한 것은 한자에 맞춰서 한글을 사용해 왔기때문이고, 우리글을 버젓이 나누고 다른 나라 글만 숭배하고 사용한 탓에 순수한 우리말의 조어법이 대부분 사라지고, 국적불명의 조어법들이 남발되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 일상에서 국적불명의 조어법들이 남발되는 것이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특히 한자에 맞춰서 한글을 사용한 습관은 오늘 날의 말글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 우리 말글을 심각하게 왜곡시켰다. 이오덕 선생님의 말씀처럼 한글이 충분하지 못해서 말글생활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우리 말글을 놓아두고 남의 말글을 따라하다보니, 말글살이가 불편한 것이다.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우리 말글을 살리는 표현을 사용하면 한자 병행또한 그 필요성이 감소하게 된다. 삼국사기에서 김부식이 임금을 왕이라고 호칭하셨지만, 삼국유사의 일연은 임금이라는 호칭을 끝까지 고수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 그 단어가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치아갯수를 뜻하는 이사금이 임금으로 바뀌었고 오늘날에도 이 단어가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 말글을 어떻게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사용하느냐가 그 말글의 필요성과 효율성을 결정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어 공용론을 선진적이고 시대를 앞서가는 발상이라고 생각하는 주장은 논의할 가치도 없는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실현 가능성또한 의문이며, 과연 제 나라 말글을 놓아두고 남을 말글을 사용하자는 주장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그 발상또한 심히 의심스럽다. 지금이야 영어가 국제어이며 대세이지만, 영어는 한때 영국 본토에서도 하층민이 사용하는 언어였고, 아름답지 못한 발음이 늘 조롱거리였다. 그리고 영어를 사용하는 필리핀에서는 영어를 사용하는 계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간의 심리적, 경제적 양극화가 심해져 이제 영어는 지배계층의 언어, 토속어는 대다수 하층민들의 언어로 전락하고 심각한 사회 양극화를 낳고 있다. 바로 귀족와 왕족은 불어를 하층민은 영어를 사용하던 이전 영국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영어가 시대의 대세라면 그 필요를 적극적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을 많이 양성하면 된다. 모든 대한민국 사람이 Hello로 인사를 대신할 필요는 없다.
아름답고 과학적인 우리 글을 놓아두고 불편하다고 투정하는 것은 그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일 뿐더러, 우리말의 아름다움 조어법을을 여전히 살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탓도 크다. 우리말 조어법들을 꾸준히 살려내고 새로 만들어내고 우리 말글에 맞게 말글을 쓰고 닦다보면 지금의 불편함들은 어느새 과거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세상에서 이렇게 아름답고 과학적인 글자가 또 어디에 있는가? 세종의 단독 창조물이라는 한글, 그의 백성을 사랑하는 숭고한 마음이 한글을 쓸때마다 손끝에서 전해오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