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주고받는 편지 -최교진 선생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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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오래 전이었습니다. 교회 문간방에 있을 때였으니 20년도 넘었습니다. 혜담 스님께서 찾아오셔서 한 5분 간 앉아 이야기하다가 먼데서 걸어 오셨으니 잠깐 누워 쉬시라고 했지요. 스님이 누워 한 1분쯤 지났을까 갑자기 옆구리에 통증이 일기 시작한 것입니다. 통증이 일어나면 걷잡을 수가 없습니다. 마치 무딘 송곳 끝으로 계속 찌르고 있는 듯한 고통이 오는 것입니다. 카데타에 소변 찌꺼기가 막힌 것입니다. 나는 스님께 이런저런 설명을 할 여유도 없이 “스님, 그만 돌아가 주십시오.”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님은 영문도 모르고 일어나 돌아갔습니다. 얼마나 황당했을지 스님의 화난 마음을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나는 스님께 그 때의 사정 얘기를 못 하고 있습니다. 여기다 혜담 스님이란 걸 밝히는 것은 혹시나 스님께서 이 글을 읽으시면 그 때의 상황을 알고 오해가 풀릴 테니까요.


나는 스님을 보내 놓고 부랴부랴 방문을 잠그고 석유 곤로에 불을 붙이고 모든 의료 기구를 꺼내 놓고 손수 카데타(고무 호수)를 갈아 끼우는 준비를 했습니다. 물을 끓이고 새 카데타를 끓는 물에 넣고 가위와 핀센트도 함께 소독을 하고 거즈를 알맞게 잘라 수증기에 찌고. 그렇게 모든 준비가 끝난 뒤 옷을 벗고 막힌 카데타를 뽑았습니다. 요강 안에 시뻘건 피고름과 함께 막혔던 오줌이 물총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처럼 뻗쳐 나옵니다. 옆구리를 지긋이 눌러 모든 찌꺼기를 다 뽑아 내고 나서 과산화수소에 탈지면을 적셔 구멍난 옆구리 둘레를 깨끗이 닦아 냅니다. 둘레의 피부가 헐어 벌겋게 벗겨져 있습니다. 깨끗이 닦은 다음 소독한 카데타를 끼워 넣습니다. 30센티 중에 25센티가 몸 속으로 들어갑니다. 눈물이 찔끔찔끔 나올 만큼 몹시 아픕니다.


작업이 끝나 요강을 비우고 모든 걸 치우고 나면 몸은 파김치가 되어 버립니다. 그대로 누워 하루 이틀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만 세균 감염을 막을 수 있습니다.


올해로 37년 간을 그렇게 카데타에 온 신경을 쓰면서 살아왔습니다. 오늘은 얼마쯤 움직일 수 있을지 항상 계산을 해야 하고 외출을 할 때나 빨래를 할 때도 몸 상태를 가늠해야 합니다.


전에 철이 없을 때는 요령도 모르고 먼 데까지 갔다가 혼이 난 일도 있습니다. 1976년인가 서울에 갔다가 이현주 목사네 집에 하룻밤을 묵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일이 터져 버린 것입니다. 이 목사한테 끌려 이곳저곳 비뇨기과 병원을 찾아가니 비뇨기과에서는 이런 시술을 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간신히 어느 대학병원까지 가서 일을 치렀습니다. 이현주 목사도 그 때까지 결핵을 앓고 있었기에 아픈 것에 대해 이해하는 편이었습니다.


그 뒤로는 먼 길엔 거의 가지 못했습니다. 누구하고 같이 있다는 것 자체가 불안한 것입니다.

지난 5월 28일 내가 아무리 오지 마라고 해도 손님은 찾아옵니다. 김중미 선생, 박기범, 김환영, 정광호 선생… 모두 여섯 분이 오셨습니다. 반가운 분들이지만 걱정이 안 될 수 없습니다. 모든 걸 체념하고 재빨리 계산을 했습니다. 어디 가서 점심을 먹고 한 바퀴 돌아 오면 세 시간이면 되겠지. 세 시간 정도면 얼굴 찌푸리지 않고 억지로라도 웃을 수 있겠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유명한 대중 가수가 된 어느 분의 중학교 시절 살았던 마을 근처에서 골부리국밥을 점심으로 먹고 고운사라는 절집에 들러 왔습니다. 전쟁 고아였던 그 대중 가수의 소년 시절 함께 중학교에 다녔던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 마을에 시집 와서 살고 있기에 그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은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분이 다녔던 학교길을 승합차를 타고 지나가면서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우리 이웃에는 아직도 전쟁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입니다.


최교진 선생님, 정말 죄송합니다. 하지만 나는 전교조가 분열한 것도 모르고, 그래서 만나지 않겠다고 한 건 절대 아닙니다.


나도 이럴 때는 서 교장처럼 자살을 해야 하는지 어찌해야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동안 못 오게 한 많은 분들이 참 속상하신 걸 알지만 도리가 없습니다.


재작년에 나는 두 권의 아나키스트에 대한 책을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신채호 선생님이 먼 중국 땅에서 고향의 아내에게 굶주리고 있는 어린 자식들을 차라리 고아원에 보내라는 절박한 편지를 보냈다는 대목을 읽고 울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편하게 사치하게 살고 있다는 죄책감이 들었습니다. 병든 사람은 예의 같은 것 지키지도 못하고. 그래서 착하게 살 수도 없습니다. 거듭거듭 죄송합니다.


2003. 6. 17. 권정생 씀 <한국글쓰기연구회>회보 2003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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