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생 선생과 나눈 수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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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손수호] 권정생 선생과 나눈 수박  [2007.05.22 22:05]

1990년대 초반이니, 오래됐다. 삐삐를 찬 허리에 진동이 왔다. 회사의 출장 명령. 동화 ‘몽실 언니’가 드라마로 만들어지니 안동에 사는 원작자를 만나라는 주문이었다.


권정생이라…. 이름만 들었을 뿐 생면부지였다. 출판사에 연락처를 물어 전화했다. “오지 마이소, 뭐 할라꼬…”. 완강한 거절이었으나 데스크는 강행을 지시했다. 기차에서 ‘몽실 언니’를 읽었다. 내용이 서럽도록 아름다웠다. 눈물이 책장을 적셨다. 친상(親喪) 이후 첫 낙루였다.


대구에서 안동 일직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였다. 먼지 속에 버스를 보내고 초막을 찾으니 우물가에 앙상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오지 말라 캤더만!”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들고 간 수박 한 통을 양동이에 담고, 찬물을 채웠다. 그래도 미동하지 않았다. 바가지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세수를 하면서 입 안의 먼지를 캭∼뱉었다. 이런 촌스런 행각을 한참 동안 보더니만 굳은 눈매를 조금 풀었다. 그러고는 “볕이 세다”며 실내로 들였다.


머슴방도 그런 곳이 없었다. 곤로와 식기 몇 개, 이부자리, 책더미와 앉은뱅이 책상, 그 정도였다. 손바닥만한 공간에 마주앉아 질문을 했다. 묵묵부답. 얼른 나가 수박을 들고 왔다. 칼을 대니 속이 붉었다. 씨를 털고 권하니 드디어 엷은 웃음을 지었다. 첫 신문 인터뷰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나중에는 사진 촬영도 말리지 않았다. “건강하시라”는 인사와 함께 좁은 마당을 쓸어주고 올라왔다.


다음날 신문에는 ‘몽실 언니’와 그 작가에 대한 기사가 한 페이지 가득 실렸다. 그러나 그의 아득한 인생은 한 줄도 설명하지 못했다.


본대로 기록하자면, 그의 삶은 거룩했다. 얼굴은 경건했고, 눈은 깊었다. 입 매무새가 단정한 만큼 논리도 정연했다. 세상을 보는 태도는 선하고, 진지하고, 치열했다. 인공배설을 하며 고환에 결핵을 앓는 고통 속에서도 주옥같은 작품을 지어냈다. 몸뚱아리 하나 건사하기 힘든 조건에서도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끝없이 걱정하는 지식인이었다. 이오덕, 전우익과 더불어 경상북도 내륙지방에서 보여준 그들의 아름다운 동행은 세속을 향한 명징한 빛줄기이자 푸른 바람이었다.


지난주 그의 부음이 날아들었을 때 나는 ‘성자의 삶’이라는 제목을 선택했다. 생각컨대, 그는 예수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늘 하늘의 뜻을 생각하고, 자연과 생명과 평화를 존중하며, 땅의 정의를 실천한 사도였다. 작품은 한결같이 낮은 자리에서 고귀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보듬었다.


권정생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매!(엄마)”를 불렀다고 한다. 평생을 고독 속에 살면서 품어온 사모곡이었으리라. 그러나 유언장에서는 예의 마지막 티끌까지 털어내는 의연함이 있다. “인세는 어린이로부터 얻어졌으니 그들에게 돌려줘야 하고, 5평짜리 흙담집은 헐어 자연으로 돌리며, 나를 기념하는 일은 일체 하지 말라.”


그가 살던 누옥 빈터에 작은 비석 하나 세운다면 누가 될까. 수박 한 통 들고, 조탑동을 찾고 싶지만, 바람처럼 사라지고 없으니, 어디서 그의 영혼을 위로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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