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똥 성자 이야기-김창규/청주기별

 강아지똥 성자 이야기


김창규 기자 gyu33@hanmail.net


 


몽실 언니를 쓴 동화작가 권정생 선생이 살고 있는 안동 밑에 의성의 조탑리를 방문하였다. 저녁해가 넘어가는데 밭가운데 5층전탑이 우뚝 서 있는 마을, 그 끝에 꽃집(상여를 넣어두어 보관하는 집)을 지나 고인돌은 권정생 집 앞 입구에 떡 버티고 누워있다. 울도 담도 없다. 개나리 꽃나무가 봄을 기다리며 찬 겨울바람에 몸을 내 맡기고 바람에 떨고 있다. 은행나무꼭대기에 가치둥지는 보금자리로서 튼튼하게 지어져 있다. 마당에는 작은 나무들이 봄을 기다리고 있다.


 


오늘 이곳을 방문하게 된 것은강아지 똥이라는 동화를 쓴 권정생의 삶의 모습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다. “몽실언니는 지금까지 100만부이상이 팔린 명작동화이다. 일본식민지에서 해방되고 한국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아로새긴 슬픈 동화책이다. 어른도 아이도 함께 읽을 수 있는 동화이다. 함께 간 사람은분단시대동인이며 경북외국어대학교수로 있는 김용락시인의 안내 덕분에 권정생 선생과 어렵사리 짧고도 아름다운 만남을 이룰 수 있었다.


 


그의 대화는 조용하고도 차분했다. 나는 마루에서 이 작은 성자에게 큰 절을 올렸다. 나는 목사이고 시인이다. 째째하거나 부패하고 정직하지 못한 그런 목사는 아니다. 그는 절을 받기를 고사했다. 몸이아프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큰 절을 올리고 방에 들어섰다. 내가 어려운 시절 살던 감옥안의 독방보다 더 작은 곳에 살고 있었다. 책으로 둘러 쌓인 벽에는 오래된 책들이 차곡차고 쟁여있었다. 몸 하나 간신히 누워 지낼만한 공간이 그 분의 방이다. 너무 비좁고 그런 방이지만 권정생 선생은 그곳이 천국인 것 같다.


 


내 뒤를 따라 김용락교수가 들어왔고 여성 시인 두 사람이 따라 들어왔다. 방이 금방 만원이 되었다. 두 여성은 무릎을 꿇고 앉았다. 김교수는 엉거주춤 앉았고 권정생 선생은 무픞을 세우고 앉았다. 나는 앉을 자리가 없어서 한겨레 신문을 쌓아 놓은 곳에 걸터 앉았다. 방 벽에는 조개로 만든 둥근 벽걸이 안에 천사같은 여자가 치마를 펄럭이며 서 있었다. 권정생 선생은 단재의 신채호 소설용과 용의 대격전갑이 이야기를 하였다. 갑이를 아느냐고 물었다. 김교수는 잘 모른다고 했다. 그랬더니 농삼아 시인이 그런것도 모르느냐며 웃었다.


 


나는 그가 연세대학 마광수 교수 시인이 다른 사람의 작품을 자기 작품처럼 발표한 이야기를 꺼내서 깜짝놀랬다. 우리가 시인이라니 그런 말을 한것 같지는 않았지만 부끄러운 이야기 였다. 고려대총장 이필상 총장의 논문표절도 잊지 않고 말했다. 권정생 선생은 한겨레신문을 통해 세상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방안에 놓여 있는 전화기 그 전화를 통해서 좋아하는 세상 사람들과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권정생 선생은 풍금을 잘 연주한다고 했다. 한 때는 교회 찬송가 반주자였고 집사였단다. 지금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 같았다. 방문 밖에 마루바닥에는 전기밥솥과 그의 생활도구들이 빽빽하게 놓여있다. 어디 다른 물건이 자리잡을 수 없을 정도로 작은 마루에 가득하다. 권정생 선생의강아지 똥보다 못한 인생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나는 청빈하게 사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부끄러웠다. 많은 인세와 고료를 받았으면 큰 집에서 사는 것이 작가들인데 그리고 무슨상 무슨상 해서 잘살텐데 듣는 이야기로는 권정생 선생은 착한일을 많이 하고 산다는 이야기를 김용락교수로부터 들었다.


 


3년전 청주에서풍덩! 책바다에 빠져 헤험치기.”라는 도서전시회를 10일동안 충북도교육청과 어울려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권정생 선생을 모시려 했는데 강사교섭을 했어도 그런 자리는 나올 분도 아니었다는 것을 금방 알게 되었다. 상업적인 것과는 무관한 동화작가 였다. 젊어서 폐가 좋지 않아 71세가 되도록 평생을 홀로 살고 있다. 그런 그의 얼굴은 평화로워 보였다. 한 때는 천주교 수녀들이 권정생 장가 보내주기 운동이 있었다는 것을 전해듣고 웃었다. 생전에 이오덕 선생과 친했다고 한다. 이현주 목사도 가끔 들르는 모양이었다. 어느 책에선가 이현주 목사와 권정생 선생을 따르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지낸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권정생 선생은 사진 찍기를 싫어했다. 나는 사진 좀 같이 찍자고 하고 싶었지만 그만 두었다. 그는 자기가 세상 밖으로 많이 알려지는게 싫은 모양이었다. 그렇지만 당당하게 사는 성자와 같은 모습이 너무 아름답고 숭고해 보였다. 따라간 여성들은 놀랬고 자신들이 너무 투정을 부리며 산 것을 반성하기도 한다. 권정생 선생은 신채호 선생의 국적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해서 그에 대한 설명을 속 시원하게 말해주었다. 최근의 단재 신채호 이야기까지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권정생 선생의 사진을 스냅으로 두 세장을 찍고 디지털카메라를 가방에 넣었다. 사진 찍지 말라고 손을 흔들고 해서 웃었다. 그 분의 하는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그는 찬찬하게 말을 했다. 그 분의 손을 잡아보니 작고 부드러운 손이 할아버지의 손과 같이 따뜻하고 정답게 느껴졌다. 대구에서 최근에겨울 가야산이야기를 시로 쓴 배창환 선생이 전화를 해서 대화가 일시 중단되었고 빨리 대구로 나오라고 해서 아쉽게 권정생 선생의 집을 나섰다. 휴대전화라고 하는 이런 때는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정생 선생은 집안 마당에 나와 우리를 전송한다. 권정생 선생의 쓰고 계신 털실모자는 겨울을 실감하게 한다. 저녁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 일보직전이다. 권정생 선생이 가르키는 고인돌을 보면서 참으로 신기하다고 말하는데 이곳에 이런 고인들이 많다고 선생은 말해준다. 권정생 선생 글을 써서 부귀영화를 누리지 않고 조용하게 살며 그는 피로 글을 쓰는 동화작가라고 김용락 교수는 차안에서 우리에게 말했다.


그가 살고 있는 조탑리 동네 밭가운데 5층 전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 큰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추측이 되었다. 김교수와 함께 온 사람들에게 기념 사진을 찍어 주었다.


 


권정생 선생이 쓰는 동화는 말로만 쓰는 것이 아니고 온몸으로 쓰는 참된 삶의 이야기였다. 오랜 병고와 싸우면서 쓰러지지 않고 좋은 작품을 쓰는 권정생 선생의 글이야말로 살아있는 예수와 같다는 생각을 했다. 권정생 선생의 이야기를 단편적으로 들었지만 직접 그분을 뵈니 금년 초에 만난 어른으로서 내가 만난 최초의 훌륭한 인물이었다. 1937년 일본 도오쿄오에서 태어났다. 1969년에 기독교 아동문학상을강아지 똥으로 받았다. 1975년 제1회 한국아동문학상을 받았다.


 


80년대 내가 감옥가고 전두환과 싸울 때 그분은 조탑동 마을교회의 종지기였다. 1984몽실언니가창비에서 출간되었다. 이후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고전이 되었다. 강아지 똥, 사과나무밭 달님, 하느님의 눈물, 점득이네, 밥데기죽데기 등의 동화들과 소설 한티재 하늘 1.2, 시집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산문집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 ‘우리등의 하나님등이 있다.


 


몽실 언니” 2001년 발행된 동화책 그림은 우리지역 제천 백운에 사는 민예총지회장 이철수 판화가의 그림이 실려있다. 나는 그림을 보면서 감동하고 그의 작품을 여러번 읽으면서 새로운 감동을 받는다. 몽실 언니의 파란만장한 삶이 그 모든 진실, 동화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름다워야만 동화가 아니다. 역사적 진실과 삶의 진실이 녹아 있어야 감동을 주는 동화가 완성 되는 것이다. 몽실 언니는 우리민족의 삶이다. 슬프고 아픈 날의 역사적 기록이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끈질긴 희망을 노래하는 몽실 언니가 바로 권정생 선생 자신인 것이다.


 


권정생 선생의 선하고 착한 눈빛을 저녁겨울 남은 작은 햇빛에 남겨두고 조탑동 마을 집을 빠져나와 대구시내 곡주사 민주화 운동의 요람을 향해 달렸다. 보고 싶은 분단시대 동인 배창환 시인을 만나기 위해서배창환 선생도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 권정생 선생을 만나 아이들이 동화책에 사인도 받고 인사도 나누었다고 소개한다. 배창환 대구인혁당 비문을 쓴 작가이다.


 


김용락시인과 함께 간 두 분의 여성시인께 감사한다. 참 좋은 하루였다. 권정생 선생을 만나니 사람의 아들로 오신예수를 만나고 온것 같아 기쁨이 가득했다. 한편으로 잘 살 수 있는데 좋지 않은 환경에서 어렵게 사는 권정생 선생의 삶이 너무 훌륭하였다. 아무 말도 못하겠다. 나는 세상 때가 너무 많이 묻은 더러운 목사요. 시인이다. 부끄러웠다. 잘살아야겠다. 정직하고 진실하게거짓없이….작은 성자 권정생 혼자 잘 먹고 잘 살기를 거부하고 착한 일 많이 하고 사는 그는 진정한 이 시대의 예수를 닮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입력 : 2007 0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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