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편지 IV ‘낭만주의자의 길‘
사람은 온전히 ‘홀로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고 나우웬(Henri Nouwen)은 말합니다. 절대자와의 관계에 대하여 거짓 없는 성찰을 할 수 있는 시간도 바로 모든 번잡한 상태를 물리친 후의 외로움 속에 거할 때라고 합니다. 온갖 종류의 탐욕(greed)과 분노(anger)로부터 해방을 경험할 수 있는 공간도 바로 더 이상 피할 데가 없는 그 곳이라는 겁니다. 다시 정색을 하고 찾아오는 가을을 맑은 정신으로 맞이해야 하는 긴장감 때문인가요?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각성과 성찰을 더 이상 미루거나 외면할 수 없는 시점입니다.
젊은 날 작곡가, 연주가로서 전 유럽을 휩쓸며 온갖 영화와 쾌락을 누렸던 리스트(Franz Liszt)도 만년에는 깊은 침묵에 귀의하며 ‘고독 속의 신의 축복‘과 같은 내면적인 작품을 내어놓았었지요. 그러나 19세기 낭만주의 작곡가들은 근본적으로 항상 외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슈베르트도 쇼팽도 브람스도 외로웠지요. 현실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환상을 끊임없이 좇았기에 외로웠고 너무 강렬한 주관과 범용(凡庸)으로 가득 찬 세상 사이의 갈등 때문에 외로웠습니다. 물론 그 반대급부로 영원히 기억되는 명작들이 바로 그들 품안에서 만들어지긴 했지만요. 한편 대중들에게 쉽게 사랑 받았던 일련의 ‘외롭지 않았던‘ 작곡가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 아무도 기억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배당된 행복을 당대에 모두 누려버린 탓이지요. 현세의 안락함에 쉽게 몸을 맡긴 이 들은 내구력 있는 작품을 남기기 힘들었습니다. 텔레만이나 살리에리 그리고 훔멜같은 이들은 그들이 속한 시대의 스타였지만 지금은 미미한 작곡가들로 간주됩니다. 대중적 기호의 허망한 변덕스러움을 용케 간파해 神과 내면의 세계로 전격적으로 투항한 리스트 정도가 당대의 각광과 후대의 평가에서 그런대로 균형을 유지한 드문 경우이겠지요.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은 현실에 대한 원심력(遠心力)을 그 주요 에너지원으로 삼습니다. 이루어질 수 없는 그 무엇에 즐겨 몸을 던지는 일이야말로 슈베르트와 쇼팽 그리고 슈만이 추구했던 음악세계의 근간이었습니다. 그들의 음악에 언제나 모종의 우수가 엷은 연기처럼 깔려 있는 건 그 때문인가요? 특히 동시대 청중의 속물근성과 예술가들의 위선에 깊이 좌절했고 용감히 대항하다 결국 개인적 파국의 길로 들어서고 만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의 음악과 생애에서 그 연기는 마침내 짙은 안개로 변하는 느낌입니다. 장황하고 피상적인 기교로 가득 찬 음악으로 대중을 미혹시키며 동시에 그들에게 영합하던 예술가들과 19세기식 상업주의가 만연한 유럽 사회를 향해 그는 거대한 골리앗 앞에 선 작은 다윗을 떠올리며 ‘다윗의 동맹(Davidsbuntler)’을 결성합니다. 물론 허구의 캐릭터들로 이루어진 가상의 그룹이지요.
플로레스탄(Floretan)은 공격적이고 적극적인 성향의 행동파이고 유세비우스(Eusebius)는 사색적이고 좀은 우유부단한 인물입니다. 음악적으로는 알레그로(빠르게) 아다지오(느리게) 로 상징될 수 있는 어쩌면 낭만시대 문학에 흔히 등장하던 ‘이중성격(doppleganger)’의 전형들 입니다. 그리고 그 둘을 절충하며 중재하는 합리적이고 지혜로운 라로(Raro)를 비롯하여 이 ‘다윗동맹‘에는 슈만의 상상력이 창조해 낸 인물들이 생생한 이미지로 모여있습니다. 그는 이들 이름을 제목으로 피아노 곡을 만들기도 했고 이들의 이름을 필명으로 신랄한 음악비평을 쓰기도 했습니다. 다분히 19세기식 낭만주의적 사고의 발로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어떤 시대에서나 슈만과 같은 ‘예술정신의 순수성과 고유성‘을 사수하려는 존재가 그 시대를 살리는 것은 아닌가요? 예술의 부패를 막는 소금과 같은 기능을 담당하는 ‘다윗‘은 어떤 시대에나 있습니다. 비록 기존의 개념들이 겉잡을 수 없이 해체되고 제어되지 않는 다중 패러다임이 어지럽게 돌아다니는 이 시대에는 이런 명제조차 비웃음의 대상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21세기에서 ‘다윗의 동맹‘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유물인지도 모릅니다.
슈만은 뛰어난 작곡가였고 탁월한 문필가였습니다. 음악사에서 그토록 폭넓은 음악외적, 특히 문학적 소양을 쌓았던 작곡가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서점을 경영하였던 부친 탓이 컸겠지만 마악 무르익기 시작하는 19세기 독일 낭만 문학의 정교하고 매혹적인 분위기에 젊은 슈만은 크게 심취합니다. 그는 다른 어떤 음악가에게서보다도 Jean Paul Richter의 소설들을 통해 진정한 ‘대위법(counterpoint)의 의미를 깨우쳤다고 고백합니다. E.T.A.Hoffmann이나 Goethe의 시와 산문은 그의 음악에 신선한 소재를 제공하는 상상력의 보물창고 였습니다. 슈만은 아마도 문학과 음악사이의 경계를 아무 거리낌없이 드나든 거의 전무후무한 작곡가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쓴 적이 있습니다. ‘화가들은 베토벤의 교향곡에서 영감을 얻어야 하고 음악가는 괴테의 작품에서 너무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는 또 좋아했던 시인 노발리스(Novalis)의 ‘원래 시인과 사제(司祭)는 하나였다. 훗날의 사람들이 그 둘을 갈라놓았을 뿐. 또한 진정한 시인이란 진정한 화가와 조각가 그리고 진정한 작곡가와 동의어이다. 즉 그들은 모두 사제이다….’ 와 같은 말을 전폭적으로 지지했습니다.
정작 흥미롭고도 슬픈 사실은 플로레스탄, 유세비우스 같이 상반되는 캐릭터들은 바로 슈만 자신 속에 공존했던 다중적 성격의 반영에 다름 아니라는 점입니다. 프로이트도 융도 나타나기 훨씬 전이지만 인간에게 내재하는 상반된 심리와 성격의 알력이 슈만이라는 한 예민한 천재 작곡가를 통해 과잉된 양상으로 분출하게 되고 결국 그것은 작곡가를 환청이나 환시(幻視) 그리고 조울증과 같은 증상을 통해 파멸의 길로 몰고 가는 단서가 되고 말지요. 그는 허구와 실제 사이에 거리를 두지 못했습니다. 마치 음악과 문학의 본질은 하나이고 시인은 곧 사제여야 한다고 줄곧 여겨왔듯이.
그는 야만적이고 허위에 가득 찬 블레셋인들을 물리친 다윗처럼 용감했으나 진정한 적은 블레셋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저항했던 강력한 바깥의 적들이 아닌 스스로의 내부에 상주했던 상호 모순적 인격의 극심한 분열과 혼돈을 이겨내지 못한 채 슈만은 소멸의 길로 접어들고 맙니다. 시대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끊임없이 부대꼈지만 진정한 평화를 얻지 못한 그의 가슴 속에는 아직 이루지 못한 꿈들과 해결되지 않은 분노들이 너무 많이 남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싸나토리움의 황폐한 고독 속에서도 버릴 수 없었던.
시인은 원래 ‘사제‘와 같은 존재였고 곧 화가나 음악가도 그와 동일하다는 명제를 굳게 믿었고 온 몸으로 그것을 실현했던 슈만.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제의 반열에 드는 대신 ‘내부의 배신‘으로 붕괴하고 마는 한 낭만주의자중의 낭만주의자가 힘겹게 걸어간 길은 여전히 자욱한 안개로 덮여 있는 것만 같습니다.
김순배 <성서와 문화 2002 가을 >
피아니스트 김순배님의 홈페이지에서 담아 왔습니다
김순배님의 허락 아래 옮겨온 글입니다.
http://piano21c.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