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

화해는 찾아가 손잡고 사진 포즈 취하며 장미 건네는 것이 아니다.
화해의 의미마저 퇴색시키는 저러한 행동들이 죽은 자를 욕되게 한다.

용서는 독재자와 그 일당의 몫이 아니고,
언제나 그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의 몫이다.

하지만 그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은 독재자와 다르다.
그들은 그들의 목숨을 내놓고도 용서를 남겼다.

독재의 단물만 빨아먹은 사람들이, 화해랍시고 설치는 꼴을 보니 속이 다 뒤틀린다.

이 땅에 언제 용서가 있었고, 화해가 있었던가?
죽는 사람들은 말이 없다. 그래서 독재자는 죽은 사람들의 없는 말을 만들어낸다.

혁명의 끝에서 사라진 전봉준을 기리며
백성은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자연스럽게 만들어 불렀지만,

연회중 총끝에서 사라진 독재자는
130억 십일조를 자랑하는 회장님 입에서 찬양받는다.

이땅에 언제, 용서와 화해를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
그런 날은 없다.
용서와 화해는 책 속에서 예쁘게 포장된 미사여구일 뿐이다.

독재자에게 그 추종자에게 용서와 화해는 없다.
그들에게는 애초부터 선택권이 없었으니까.

http://hani.co.kr/arti/politics/politics_general/22180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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