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치기 도사들 / 김규항
자신의 오류를 역사의 오류로, 자신의 실패를 역사의 실패로 돌리는 데 능한, 유약하고 비굴한 인탤리들은 역사적 격변 앞에서 종종 파행한다. 한국에서 1980년대의 열망과 90년대의 좌절이라는 역사적 격변 역시 인탤리들의 이런저런 파행을 낳았다. 인탤리들의 그런 파행은 단지 제 삶에서 현실의 무게를 덜어보려는 얕은 수작에 불과하지만, 그들의 고유한 기술(제 생각을 글이나 말로 남다르게 표현해내는)과 결합하여 자못 그럴싸해진다. 그런 파행의 가장 멋진 예는 바로 `도사‘다. 김지하에서 박노해까지, 역사적 격변 앞에서 인탤리들은 `모든 것을 깨우친 도사‘가 되어 현실을 `초월‘한다.
“똥을 누면서 나는 내가/아래 위로 구멍 뚫린/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아하! 내가 통이다/내가 걸어다니는 통이다” 10월 27일치 <한겨레>를 보며 나는 서글프게도 내 청년시절의 소중한 선생이던 이현주 목사가 도사의 대열에 합류했음을 알았다.
도사가 된 그는 말한다. “부시와 라덴은 같은 편이다. 그들은 싸우는 척하지만 서로를 돕고 있다.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세력의 대표들이 바로 그들이다.” 얼핏 공평무사하기 짝이 없는 그 말은 (경솔하게도 라덴이 미국 사건의 범인이라는 미국의 주장을 전제로 하는 데다) 그 사건을 둘러싼 역사적 사실관계들을 마치 진공상태처럼 차갑게 뭉게버린다.
미국사건은 어느 호사스런 서양학자의 말처럼 `문명의 충돌‘이 아니고, 부시의 말처럼 `자유에 대한 침범‘은 더더욱 아니며, 단지 `오랜 일방적 가해자가 당한 뒤늦은 최초의 보복‘이다. 그런 분명한 사실 앞에서, 가해자의 무소불위한 권세 덕에 단 한번도 제대로 인류 앞에 제 억울함을 알릴 수 없었던 수많은 사람들의 한 앞에서 `폭력은 모두 나쁘다‘는 지당한 말씀(폭력을 사용하는 누구도 폭력이 좋은 거라 말하진 않는다)이나 읊조리는 일은, 동네 양아치의 싸움 앞에서 `누가 먼저 때렸는가‘를 따지는 파출소 순경보다 한가롭다.
그는 다시 말한다. “모세는 앙갚음을 하라고 했지만,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우리는 기독교를 대표할 만한 이 유명한 경구가 역사 속에서 피억압자의 정당한 분노를 무마하는 데, 늘상 동원되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수는 평화주의자였으나 뼈 없이 흐물거리는 무작정한 평화주의자가 아니었다. 예수는 어떤 극악한 상대도 끝내 용서했지만, 그 극악함에 분노하는 데 폭력적일만치 분명했다. 이를테면 예수는 타락한 성직자들과 뒤로 결탁한 장사치들을 성전에서 한번에 쫓아낸다. 갈릴리 출신의 별볼 일 없는 청년은 단지 자애로운 얼굴로 “여러분의 행동은 부적절합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일을 성공할 수 있었을까.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마태 23:33) 성서에 기록된 예수의 행적은 `끝내 용서하되, 분명히 분노하는‘ 방식으로 점철된다. 예수가 결국 정치적 혁명가의 혐의로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사실은 바로 예수의 그런 독특한 지점을 드러낸다. 예수는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었지만 그의 행적은 늘 정치적 혁명가로 오해받곤 했다. 예수는 끝내 용서하되 분명히 분노했으며, 정치적 해방을 구원으로 삼지 않았으되 매우 정치적이었다. 그것이 예수가 단지 분노하지 않거나 단지 정치적이지 않을 뿐인 얼치기 도사들과 구분되는 지점이며, 끝내 용서할 줄 모르거나 정치적인 해방을 구원으로 삼는 하고많은 혁명가들과 구분되는 지점이다.
역사적 격변 앞에서 얼치기 도사들은 `깨우침‘으로써 비루하고 덧없는 현실을 `초월‘한다. 그러나 예수나 부처와 같은 가장 위대한 성인들은 도리어 `깨우침‘ 이후에 그 비루하고 덧없는 현실에 자신을 녹여 넣곤 했다. 그 비루하고 덧없는 현실 속에, 그 비루하고 덧없는 현실에 얽매여 살아가는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의 서러운 가슴 속에 우주와 생명의 이치가 있다.
김규항/ 출판인
김규항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얼마 전 <한겨레>에 쓴 ‘얼치기 도사들’은 약간의 소란을 낳았다. 이미 해병전우회나 의사들과 더 큰 소란을 겪기도 했거니와 졸렬하나마 사회적 의견을 제출함으로써 일용할 양식을 얻는 사람으로선 그런 일을 피할 수 없다 생각하는 나로선 대수롭지 않아 할 만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 접을 수 없는 불편함이 내내 남았다. 그 글은 내 청년 시절의 소중한 선생 가운데 한 사람을 겨냥하는 패륜을 담았기 때문이다.
그, 이현주 목사는 그저 예수를 팔아먹는 크고 작은 보도방들인 한국 교회에서 예수의 삶과 정신을 되새기는 일에 분투했다. 그가 짓거나 옮긴 예수와 복음서에 관한 몇몇 노작들은 서남동 안병무 같은 민중신학자들과는 다른 맥락에서 내게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다. 민중신학자들이 내게 예수를 논증해주었다면 이현주는 내게 두런두런 예수를 들려주었다. 최악의 반동과 최고의 열정이 맞서던 시절, 그와 권정생(<강아지똥>을 지은) 들은 조용한 소금이었다.
10여년이 흘러, 전해 듣는 그의 근황은 나를 적이 답답하게 했다. 우주적 이치를 깨친 듯한 얼굴을 한 그는 건전함을 잃고 있었다. 건전함을 잃는다는 건 대개 지저분한 현실로의 투신을 말하지만 드물게는 현실을 멀쩡히 초월해버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의 깨우침이 현실을 둘러싼 대립과 갈등이 욕망의 충돌에 머무는 일을 비판한다면 올바랐지만 급기야 그 깨우침이 “부시와 라덴은 같은 편”이라는 오만한 중립주의에 이르자 나는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를 가장 신중하게 그러나 가장 악랄하게 비판하는 방법으로 그에 대한 내 존경을 표시하기로 했다.
“폭력은 모두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없다. 심지어 폭력을 사용하는 어떤 놈도 폭력이 좋은 거라 말하진 않는다. 그러나 모든 폭력은 모두 다르며 폭력을 반대하는 일은 그 다름을 세심하게 따지는 일에서 출발한다. 우리가 폭력을 반대하는 이유가 폭력이 우리의 알량한 미감을 거슬러서가 아니라 폭력에 처한 구체적인 인간들과의 연대감 때문이라면 말이다. 수십년 동안 단지 미국에 꿇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사랑하는 사람과 아이들이 죄없이 살해당하고 능욕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사람들의 분노 앞에서 “폭력은 모두 나쁜 것”이라 읊조리는 건 폭력적으로 한가롭다. 그런 말은 단지 그런 말을 하는 이가 그 처참한 현실과 철저히 무관함만을 지시한다.
역사 속에서, 특히 한국의 80, 90년대와 같은 격변의 역사 속에서 인텔리들은 제 좌절감을 세상에 치환하여 모면하려 한다. 이를테면, 정치적 변혁에 몰두하던 인텔리는 그 시도가 실패한 뒤 좌절감 속에 제가 생명이나 인간 같은 ‘좀더 근본적인 문제들’을 빠트렸음을 깨닫게 된다. 문제는 깨달음이 아니라 그런 깨달음 뒤에도 여전한 오만함이다. 빠트렸던 문제들은 원래의 문제를 보완하지 않고 전적으로 대체된다. 이제 그에게 정치적 변혁은 그저 낡고 부질없는 관념이다. 전에 그에게 생명과 인간이 낡고 부질없는 관념이었듯 말이다.
정치적 변혁을 배제한 생명과 인간의 탐구란 관념적 장난에 불과하며 생명이나 인간의 문제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본디 출발점이라는 총체적 사실은 그들에게 애써 부인된다. 그들은 그런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제 삶이 몹시 고단해질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제 그들에게 깨달음이란 비루한 현실을 초월하고 오늘의 안식을 설명하는 수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들은 열심히 깨닫고 그 깨달음을 더욱 열심히 광고한다. 혁명가의 이력을 팔아 문화자본가로 행세하려는 싸구려 코미디언에서 현실적 절망감을 우주적 깨우침으로 초월하려는 얼치기 도사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오늘도 열심히 세상을 공전한다. 과연, 내 존경은 회복될 것인가.
김규항/출판인 gyuhang@ma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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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가득 차 있는데, 마음은 텅 빈 것 같다.
물론 내가 잘 모르는 것이기도 하지만, 머리보다는 마음이 앞서는 세상이 더 따듯하다고 생각한다.
머리 없이 살자는 것이 아니라, 머리만 쓸 것이 아니라 마음도 같이 쓰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