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프랭에의 헌정

피아노라는 악기의 과거를 이해하는 일은 대체 얼마큼 중요한가?
과연 중요하기는 한 것인가
?  
앤젤라 휴이트의쿠프랭의 건반음악-I’을 듣기 시작할 때 떠오르는 생각이다
.
그러나 듣기를 끝낼 때 쯤이면 피아노의 모든 면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한 성실한 연주자가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통찰할 수 있을 때

얼마나 창조적인 결과가 나오는지 실감하게 된다
.
피아니스트들이 잘 돌아보려 하지 않는 바흐 이전 로코코풍의 건반음악 속에는

또 얼마나 많은 음악적 영감들이 숨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기도 하다
.
그러니까 랜도브스카나 튜렉의 정신적 맥락을 계승한

휴이트의쿠프랭에의 헌정(Le Tombeau de Couperin)’이 거둔 수확들은 많다
.

쿠프랭의 악기, 즉 하프시코드라고도 불리우는 클라브상(Clavecin)작품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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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쉬타인웨이를 통해서 다시금 생명력과 의미를 부여받았다
.
어지러움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복잡한 장식들과 어디로 달려갈지 모르는 리듬들

그리고 몹시도 미묘한 감정처리에 이르기까지 18세기 프랑스 로코코의 정신은 현란하다
.
그 혼곤한 로코코풍이 휴이트의 꼼꼼한 지적 통찰력에 의해 한 번 걸러져서

거의 투명에 가까운 진수로 전달된다
.
지적인 통찰로 말하자면 휴이트의 대선배 로잘린 튜렉이 바로 연상된다
.
그러나 튜렉이 원전악기인 하프시코드로 직접 연주하기를 즐긴 것과 대조적으로

현대의 묵직한 피아노로 18세기의 감성을 그대로 옮겨오는

휴이트의 작업이 한결 어려웠을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다
.

프랑소와즈 쿠프랭(1668-1733)의 클라브상 작품들 속에는
두말할 것 없이 춤의 정신이 깊숙이 배어있다
.
당시에 틀을 잡기 시작하는춤곡 모음(suite)’이라는 명칭대신

쿠프랭은 좀더 융통성 있는오르드(ordre)’라는 제목을 사용한다
.
숨가쁘게 내닫는 리듬들과 정반대의 축축한 멜랑꼴리들 사이에

발레와 오페라가 성했던 나라답게 극적인 제스츄어와 감정의 굴곡들이

풍부하게 포진해 있다
.
덧붙여 쿠프랭이 영향 받았던 이탈리아 풍의벨 칸토기법에 이르기까지

얼핏 정형화된, 혹은 박제화된 춤곡들로 치부하기 쉬웠던 그의 춤곡들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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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 감성의 적나라한 단면들과 더불어

당대의 음악정신을 재구성해 볼 수 있는 상상력의 뼈대까지도 들어있다
.

쿠프랭이 그토록 애호했던 장식음들과 트릴들은 거의 범람상태에 가깝게 넘치지만
휴이트는 현대의 피아노포르테 위에서 그것들을 다루는 방식의 모범을 보여준다
.  
단순히 꾸미는 기능을 넘어서서 익스프레시브한표정을 담으려 애썼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한 ‘tempo rubato’가 조금은 어색한 듯도 싶지만

그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
또 하나 발군의 해석은 페달 사용 없는 레가토주법이다
.
수록 곡들 중 두 번째 그룹의 ‘L’Attendrissante’는 시종 건반의 낮은 음역에서 진행되는

감정 실린 선율선과 장식음들이 꽤나 부담스러운 곡인데

휴이트의 신중한 감각과 통찰에 실린 음들은 거의 기적처럼 옛 클라브상의 느낌을

피아노포르테 위에서 재현하고 있다
.
바로 이어지는 ‘Le Tic-Toc-Chou’는 또 다른 해석의 승리이다
.
클라브상의 두 단 중 윗 단에서 쳐야하는 부분을

휴이트는 피아노의 가장 높은 음역으로 옮겨왔고

그 효과는 단순히 옛 하프시코드의 음향을 복원하는 것을 넘어서서

피아노포르테의 새로운 가능성 발견에까지 이른다
.

보다 정형화된 춤곡들의 모음인 마지막 그룹에 이르면
어느새 내가 듣고 있는 것이 클라브상인지 혹은 피아노포르테인지 구분이 아니 되는

혹은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경지에 다다른다
.
당대의 클라브상으로는 결코 얻어낼 수 없었을지도 모르는 섬세하고 다양한 뉘앙스들이

휴이트를 통해 훨씬 상승된 효과를 얻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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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의 마인드에 발전적 재해석의 옷을 입혀 진정한쿠프랭에의 헌정을 실현하고 있는
휴이트의 계속될 다음 작업이 기대된다
.

*쿠프랭/ 건반음악-I/ 앤잴라 휴이트, 피아노/ Hyperion CDA67440

– ‘VOX’ 9월 호


 


피아니스트 김순배님의 홈페이지에서 담아 왔습니다


김순배님의 허락 아래 옮겨온 글입니다.


http://piano21c.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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