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교회라는 독

얼마 전 오정현 목사의 미국 발언에 이어 드디어 사랑의 교회 옥한흠 목사께서 이번 선거의 대미를 장식해주셨다. 자세한 내막은  ” 사랑의교회 공식 대선후보 – 기호2번 이명박장로 ” 참조하시기 바란다.

사랑의 교회 성도 몇 분은 어떻게 옥한흠 목사님이 그러실 수 있느냐 배신감을 토로하시는데, 나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옥한흠 목사는 예전부터 지금까지 늘 그래 왔다. 사랑의 교회 성도분 들만 모르고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대형 교회 목사들의 비리나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 언급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개똥을 만지는 것과 같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우리 모두가 아는 사실이니까.

나는 대형 교회라는 것의 본질에 대해서 말하고 싶다. 그것은 맘몬을 끝없이 숭배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일 뿐이다. 보다 많은 교인, 보다 높은 교회 첨탑, 보다 많은 교회 버스, 이 모든 것은 하나님보다도 맘몬을 더 사랑하는 우리들의 모습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치장한 것일 뿐이다. 그것은 가난해지기 싫은 우리의 마음이다. 예수를 팔아넘긴 유다처럼, 예수를 팔아 넘긴 우리의 욕망이다.

주어진 가난은 극복의 대상이지만, 선택한 가난은 그리스도인이 따라야 할 주님의 발자국이다. 주님의 그 길은 대형교회의 높은 십자가에 있지 않고, 화려한 로마 바티칸 궁에도 있지 않다. 그 길은 소외받고 아파하는 세상의 모든 낮고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 누구나 아는 이 길을 누구나 걸으려 하지 않는다. 그 길을 걷는 사람은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짊어지고 걷는 사람이고, 나를 내려놓고 주님을 찾는 사람이었다. 나를 포함해서 우리 대다수는 그 길을 흠모하거나 그 길을 걷는 척할 뿐이다. 황금 십자가를 짊어지고 금대를 차고 개선장군처럼 그 길을 걷는 척, 그래 ~척할 뿐이다.

길은 최소한을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부자는 길을 나설 수 없고, 가난한 사람만이 길을 나설 수 있다. 그 길을 걸어간 신앙의 선배 성 프란체스코가 낡은 수사복과 허리띠 외에는 아무 것도 갖지 않았던 것은 그는 길이 말하는 말 없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욕망의 봇짐을 짊어지고는 반나절도 길을 걸을 수 없다. 아무 것도 갖은 것이 없어야 길을 걸을 수 있다. 이 단순하지만 위대한 진실을 성 프란체스코는 평생의 삶으로 우리에게 증거 해보였다.

우리는 이 위대한 신앙의 선배를 따르려 하지 않는다. 우리의 눈에는 맘몬이 쌓아올린 거대한 중세 성당이 우선 들어온다. 하늘을 찌를듯한 장엄한 성당은 비와 바람을 막아주며, 더위와 추위에서도 우리를 지켜준다. 우리는 더이상 길을 나서려 하지 않는다. 이제 이 거대한 성당이 우리의 왕국이고, 이 거대한 왕국의 확장이 우리의 지상과제가 되어버린다.

그러나 그곳에 예수는 없다. 거대한 교회 첩탑과 수많은 교인 사이에는 예수가 없다. 그들 개개인의 마음은 어떤지 몰라도 교회라는 이름,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는 더 이상 예수가 살 수 없다. 그 변질되어 버린 거대한 권력안에서 자라는 것은 우리의 자만이요, 끝을 모르는 욕망일 뿐이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거룩을 거룩으로 알고, 황금 십자가들 들고 금관을 쓴 예수를 진짜 예수로 알고 살아간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목수로 살아온 예수는 간데없고, 황금 마구간에서 태어나 황금 옷을 입고 저 높은 십자가 첨탑에 서 있는 예수만 남아 있다.

오늘날의 한국 개신교를 바라보면 예수님은 어떤 표정을 짓고 계실까? 아마도 눈이 붓도록 평펑 울고 계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 중 누가 예수님의 눈물에 귀를 귀울이고 있을까? 대형 교회라는 안락한 집에 살면 예수님의 눈물을 알지 못한다. 안락한 집에서는 살을 에는 추위도, 감당할 수 없는 폭풍도 알지 못한다. 길은 오직 길 위에만 있다. 예수님의 눈물은 그 길위에 있고, 눈 부칠 땅 한 조각 없는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

교회는 공동체다. 우리가 서로 형제, 자매라고 부르는 것은 피보다 진한 교회라는 이름의 가족으로 맺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은 수천, 수만 형제를 다 사랑하지 못한다. 사랑은커녕 수천, 수만 형제들의 이름조차 알 수 없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다는 시인의 말처럼 가족이라면 이름은 알아야 되지 않을까? 물론 나는 교회의 적당한 규모를 재단하고 정의할 능력도 사람도 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라고 말할 수 있다면 적어도 우리 가족의 이름은 모두 알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끝으로 이 어두운 세상에 작은 예수의 삶으로 우리에게 큰 빛을 안겨주고 떠난 권정생 선생님의 글을 옮겨 적는다. 선생님의 글에 나오는 아줌마처럼 우리는 거지도 예수님으로 볼 눈과 마음을 가졌는가? 그 마음을 갖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될까? 많은 방법과 길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우리 교회 공동체, 교회라는 이름의 가족이 제 이름을 찾고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리라 믿는다.

세상에 많은 길이 있지만,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수님이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야 하지 않을까?
비록 그 길이 고난과 눈물의 길일 지라도 말이다.



  얼마전에 가까운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려는데 버스비가 모자라 할 수 없이 완행기차를 타고 왔다. 그런데 기차안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자리를 내주면서 앉으라고 권했다. 나는 가까운 두 정거장만 가면 내릴 테니 괜찮다고 사양을 했지만 아주머니는 기어코 앉기를 권해서 황송하게 자리에 앉았다. 나는 앉아서 무심코 아주머니꼐 혹시 교회 나가시는 분이 아니냐고 여쭈었더니 아주머니는 금방 반색하면서 그렇다는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해 기뻐하며 묻지도 않은 말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의성지방 시골교회 집사님인데 한 십년전에 이상한 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들어보니 꼭 옛날이야기만 같은 내용이었다.

  어느날 아주머니는 몹시 바쁘게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어떤 거지가 구걸을 하러 왔다.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던 아주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귀찮아서 퉁명스럽게 지금은 바쁘니 다른 데나 가보라고 거지에게 박대를 하며 내쫓은 것이다. 그런데 돌아서 나가는 뒷모습을 힐끗보니 놀랍게도 틀림없는 예수님이었다.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허겁지겁 쌀을 한 대접 떠서 달려나가 보니 거지는 그새 어디론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옆집으로 또 옆집으로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역시 허사였다. 집으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그때부터 아주머니의 눈에는 어떤 낯선 사람도 예수님으로 보이게된 것이다. 그렇게 아주머니는 십년을 하루같이 만나는 사람을 모두 예수님으로 알고 대접을 했다.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아주머니는
  “세상 사람이 다 예수님으로 보이니까 참 좋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리고 싶어예.”
 
  그날 나는 살아있는 동화의 주인공 같은 아주머니를 한없이 쳐다보며 부러워했다. 여태껏 들어온 설교 중에서 진짜 설교를 들은 것이다. 버스비가 모자라 기차를 타게 되었고 뜻밖에 예수님 대접도 받고 아름다운 이야기도 들었으니 그날은 꼭 천국에 사는 기분이었다. 그 시골교회 아주머니는 가장 복된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분인 것이다.


대형교회라는 독”에 대한 2개의 생각

  1. 제게도 참 와닿는 이야기입니다. 좀전에도 집에 난방미터키를 측정하러 오신 분 말씀이, 미안하지만 일이 끝나면 잠시 화장실을 써도 되겠냐 물으시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화장실을 못쓰게 한다는 거에요. 무서운 세상이라 조심스럽기도 하겠지만, 이렇게나 각박해진 사람들 마음에 점점 더 세상이 흉해지는 것 같습니다.

  2. 그곳 독일은 사람 사는 모양새가 이곳보다 더 야박하네요.
    그래도 이 나라는 아직은 그 정도인 사람이 많지는 않은 것 같네요.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단순히 풍족하다고 해서 나이지지는 않나 봅니다.
    가진 것이 없어도 풍족한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오늘은 자기 전에 잠시 기도하고 잠에 들어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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