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와 인간과 정의

십자가와 인간과 정의

– 함세웅 신부(상도동성당 주임, 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장) –



해골산이라는 곳에 이르러 사람들은 거기에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고


죄수 두 사람도 십자가형에 처하여 좌우편에 한 사람씩 세워 놓았다.


(루카 23,33)

반성과 숙고


1. 예수의 십자가와 그 양옆의 각 십자가, 이 세 개의 십자가는 바로 우리 인생의 삶을 압축한 모습이기도 하다. 억울하게 죽은 무죄한 예수의 십자가, 죄 때문에 죽는 마지막 순간에도 자신과 이웃을 경멸하는 왼쪽 강도의 십자가, 비록 죄는 지었지만 최후의 죽는 순간에 이웃의 아픔을 함께 하며 이웃과 관계를 맺는 오른쪽 강도, 이 셋은 세 부류의 인간을 예시한다.


사실 여기서 우리는 예수와 같은 구원자인지, 왼쪽 강도와 같은 오만 불손, 실망과 좌절, 포기와 무관심 그리고 저주의 당사자인지, 또는 오른쪽 강도와 같이 겸허한 고백과 자비의 기도로 첫번째로 하늘나라에 들어간 행운아인지, 이 세 유형 중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하는지 진지하게 자문하게 된다. 우리는 비록 예수와 같은 십자가의 삶은 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오른쪽 강도와 같은 겸허하게 자비심을 지닌 삶을 살도록 다짐한다.


사실 본래 십자가는 끔찍한 사형틀이다. 십자가는 두려움과 공포 자체다. 그러한 십자가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사건으로 그리스도교의 상징이 되었고 그 때문에 사형틀의 두려움은 깨끗이 사라지고 새롭게 승화된 은총의 상징이 되었다. 사형틀이 사랑과 용서, 죽음을 넘어선 희망과 부활의 징표가 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엄청난 사건이다. 바로 이것이 기적이며 신비가 아닐까.



2. 인생은 필연적으로 고통과 연계된다. 오죽했으면 고해(苦海)라 했을까. 인간의 운명은 참으로 비참하다. 사실 인간은 고통을 당하게 마련이고 또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 그리고 죽음을 넘어설 수 있는 큰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 정신력과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죽음보다 더 큰 사랑, 때문에 인간은 위대하다.


예비자 첫과정의 인생론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인간의 양면성을 언급한다. 죽음 앞에 한계적일 수밖에 없는 인간이지만, 인간은 결코 허무적 존재가 아닌, 그보다 훨씬 크고 위대한 것을 이룰 수 있는 창조적 존재임을 일깨우면서 하느님께로 향한 개방적 자세를 강조하며 인간에 내재된 종교성, 무한의 가능성을 설파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이기에 그 천부적 권리와 만물의 영장, 인간의 존엄성 등을 강조한다. 어쨌든 인간은 십인십색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삶과 사고의 방식을 지니고 살아간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어떤 공통적 요소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공통의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 사랑, 행복, 성공, 번영, 구원, 영생 등이다. 굳이 도식적으로 표현한다면 이것은 바로 인간의 다양성과 일치성이다. 다양성. 그렇다, 사람은 서로 다르게 마련이다. 그러니 고통과 죽음의 모습도 그 만큼 다르다. 이것은 십자가도 사람의 수만큼 많고 다르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결국 십자가란 인간과 동의어가 된다.


인간은 누구나 공통적으로 행복을 추구한다. 행복이란 자기실현 또는 자아완성이다. 그것은 소유의 충족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런데 엄밀한 의미에서 소유충족이란 불가능하다. 그래도 사람은 꿈과 이상을 지향한다. 진선미의 실현 또는 절대자의 소유를 통해 자아완성을 지향하며 초월을 꿈꾼다.


톨스토이는 그 생의 종합작품인 <부활>에서 인생의 모든 과정을 논하고 있다. 법정의 더러운 이면, 검사․판사․배심원의 이중적 삶, 죄인, 잊었던 죄의 기억, 보속의 삶, 경찰, 유치장, 교도소, 그 안에서 벌어지는 진풍경들, 종교의 위선, 성직자들의 가식, 국가기관의 공권력 남용,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제1의 폭력, 대지주와 노비와의 갈등, 혁명가의 좌절, 시베리아 유형의 삶, 배신과 갈등, 몰이해와 이별, 그리고 결국 홀로 남아야 하는 인생의 운명을 그리며 외로움과 허탈,  씁쓸함과 허무 속에서 그래도 삶에 희망을 주는 한가닥의 빛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는 인생의 설교자, 도덕실천가, 복음선포자로 변모된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 변화는 성서, 또는 절대자와의 만남, 그리고 이웃을 통한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 만남은 미래를 열어주는 새로움과 깨달음이다. 이것이 바로 부활이다.


깨달음과 부활은, 오직 하느님 나라와 정의에 대한 인식에서만 가능하다. “너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 정의를 구하여라. 그러하면 이 모든 것도 덤으로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

3. 하느님의 나라와 정의, 이것이 최우선의 가치다. 그런데 사람들은 먼저 구해야 할 하느님 나라와 정의는 구하지 않고 덤으로 약속된 것을 먼저 구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때문에 이 세상 인간의 삶에는 늘 모순과 갈등, 전쟁과 불목으로 가득차게 마련이다. 그렇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정의를 구하자. 그러면 모든 것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정의는 바로 진, 선, 미의 집약이다. 정의는 하느님의 속성과 그 나라의 특성을 가장 완전하게 드러내는 대표적 표현이다. 아니, 정의는 하느님과 그 나라의 동의어이다. 정의는 완전 자체다. 십자가, 인간, 정의는 이렇게 연결된다.

Ⅰ. 십자가와 인간



십자가와 연대성


1. 사람의 수만큼 많고 다른 십자가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은 모두 예수의 십자가 앞에서만은 무릎을 꿇고 십자가를 경배한다.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 대한 경배이며, 예수의 삶을 수락하고 예수의 뒤를 따르겠다는 결심과 기도이다. 십자가는 이제 예수와 동일시된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와 그 죽음을 유일회적 사건으로, 모두를 구원한 하느님의 은총으로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왜 예수의 죽음이 나에게 구원을 주고 있는가라는 물음도 제기한다.


사실 우리는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죄, 곧 원죄 때문에 벌을 받고 그 대가를 치르고 있음을 고백한다. 아담과 하와, 그들의 삶은 모든 인류의 운명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와 자녀, 또는 조상과 후손은 모두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인류의 연대적 관계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서로 필연적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부모의 선업은 나름대로 자녀들에게 필연적으로 영향을 주며 반대로 자녀의 공과도 또한 부모에게 영향을 준다. 아주 쉽게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우리는 부모의 은덕을 받고 살며 부모의 영향력은 우리 인생행로를 거의 좌우하고 있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부모의 은덕은 별로 없었으나 피눈물나는 본인의 노력으로 이른바 성공을 이룬 경우 말이다. 그때 자녀의 성공은 부모에게 영광과 자랑이 된다. 이것은 연대성의 역관계다. 구원의 원리는 바로 이러한 연대성과 가정관계에 기초하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아담과 하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음이 온 인류에게 미치게 되었다. ……  그러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은총의 경우와 아담이 지은 죄의 경우와는 전연 비교가 되지 않는다.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하느님의 은총의 경우에는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덕분으로 많은 사람이 풍성한 은총을 거저 받았다. …… 아담의 범죄의 경우에는 그 한 사람 때문에 죽음이 군림하게 되었다. 그러나 은총의 경우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풍성한 은총을 입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거저 얻은 사람들이 생명의 나라에서 왕 노릇 할 것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은총의 힘이 얼마나 더 큰가!”(로마  5,12-17).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와 나 그리고 이웃과 나는 이와 같이 필연적 관계에 있다. 전 인류가 바로 같은 가족이며 한 가정을 이룬다. 사실, 사랑의 책무는 이러한 연대성을 확인하는 자명한 원리이다. 때문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사목헌장 1항에서 교회와 세상, 신앙인과 전 인류가 바로 같은 목적을 지닌 연대적 관계의 공동체임을 선언하고 있다.



십자가, 변혁과 영성의 근원


2. 때문에 십자가의 전례적 교훈은 수직과 수평 그대로 하느님과 인간, 곧 세상에 뿌리 내리고 살아야 할 신앙인의 자세를 일깨워주고 있다. 세상 안에서 이웃과 함께, 세상의 문제를 고민하면서 성실한 삶을 살라는 십자가의 교훈은, 이제까지 세상을 외면해 왔던 지난날의 삶을 반성하고 세상 한복판에서 세상의 문제가 바로 교회의 문제임을  새롭게 깨닫게 한 교훈이다. 교회가 현실문제 곧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면에 관계하여 사목적 언급을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며 십자가의 본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예수의 십자가 죽음사건이 바로 성전 밖 곧 골고타에서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이 골고타는 세상 한복판이다. 또한 예수는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것은 정치적 사건이다. 바로 세상 한복판, 법정의 재판이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는 전례의 근원이며 뿌리임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세상의 사건, 정치와 무관한 전례는 십자가와 예수의 죽음사건을 관념화한, 참으로 정체된 그리고 일그러진 신심의 한 행태일 뿐이다.


양보다 질이란 말이 있듯이, 요사이 우리는 삶의 질을 우선적으로 지향한다. 그렇다. 신심도, 정신도, 영혼도 질을 높여야 한다.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을 비롯한 모든 종교인들은 영성을 추구한다. 영성(spiritualitas)이란 바로 영(spiritus)와 질(qualitas)의 합성어다. 어원적으로는 오히려 영질(靈質)이라 번역해야 하는데 한자 문화권에서는 영성(靈性)이라 번역했으니 어쨌든 여기서 질(質)과 성(性)은 동의어가 되는 셈이다. 여성신학의 관점에서 고찰하면 성(性)이 바로 질(質)을 규정하는 핵심이 된다. 그런데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문화는 성차별을 통해 여성을 경시하니 이는 결과적으로 성(性) 자체를 무시한 것이다. 때문에 이런 문화 속에서는 질(質)이 떨어진 한 단계 낮은 영성(靈性)만이 형성되게 마련이다. 참된 영성은 성차별을 타파함으로써만 이루어지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영성의 근원은 무엇인가. 하느님을 닮고 하느님의 성성(聖性)을 접하는 것이다. 예수가 바로 영성의 기초가 됨은 바로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 아니,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의 영성이 활짝 꽃피운 자리는 바로 골고타 언덕 십자가에서다. 거기에는 제단도 촛대도 없다. 영성은 이와 같이 피땀 흘린 일상의 자리, 삶의 자리에서 확인되는 가치다.


사람은 자유를 지향한다. 때문에 해방을 위해 투신한다. 불의와 폭력, 모순과 싸우며 자신을 던지는 의인들을 우리는 곳곳에서 만난다. 이들이 바로 세상을 밝힌 등불이다. 예수는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 그리고 누룩이 되라고 하셨고 그 자신이 실천하고 그 모범이 되셨다. 그런데 예수의 삶은 십자가 죽음으로 마감되었다. 그 죽음은 바로 소금, 빛, 누룩이 되는 필연적 과정이다. 그 죽음은 불의한 권력의 결과다. 그 죽음은 때문에 불의를 거부하고 정의를 세우라는 외침이기도 하다. 그 죽음은 세상을 향한, 세상을 위한 투신의 죽음이다. 사실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 싸우다가 감옥에 갇히고 죽어가는 투사들은 자신의 선배인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서 큰 힘과 용기를 얻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온 세상에 엄청난 변혁을 가져왔듯이 그들은 자신의 고통과 죽음에서 은총의 같은 힘을 확인했다. 감옥에서, 수용소에서, 고문실에서, 처절하게 죽어간 많은 의인들의 죽음은 바로 그 시대마다 새롭게 세워진 예수의 다른 십자가였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확인인 부활


3. J. 몰트만은 그의 저서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에서 십자가가 지닌 엄청난 힘, 그 전복과 전도적 가치를 역설했다. 모든 것을 뒤엎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한 예수의 십자가는 우선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끔찍한 세상, 잔인한 인간, 비참한 인간의 운명, 그리고 그 때문에 울어야 할 우리의 운명, 십자가는 바로 세상과 인간의 자화상이다. 십자가는 또한 기적과 능력의 예수, 그분의 한계를 보여준 엄청난 사건이다. 기적의 예수, 죽은 사람도 살린 생명의 예수를 죽이는 그 십자가, 그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쓴 잔을 치워달라고 그렇게도 애원했건만, 이루어지지 않았던 예수의 기도, “하느님, 하느님, 어째서 나를 버리셨습니까”하며 하느님을 향해 울부짖으셨던 예수, 십자가 앞에서 과연 예수는 누구인가를 새삼 되묻게 된다. 십자가는 냉혹한 현실이다. 하느님의 아들도 사정없이 못박아 죽게 하는, 아니 하느님의 손길을 떠난 독자적 영역이다. 십자가는 참으로 무섭고 두렵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한계, 죽음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 마저 피할 수 없었던 필연적 과정,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그러나 부활이란 무엇이냐? 죽음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니냐. 죽음이 없다면 부활은 논의되지 않는다. 때문에 부활은 바로 십자가를 통한 생명의 확인, 그리고 죽음의 수락, 바로 그것이다. 부활은 고통의 수락이다. 두려움없이 죽음을 받아드리는 자세, 그것이 바로 부활이다. 죽음보다 더 큰 사랑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죽음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일깨워주었다. 즉 죽음에 영원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부활이란 바로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확인하고 선언함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예수께서 죽음을 이기고 물리치셨다는 것은 죽음을 제거하신 것이 아니라 죽음의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셨다는 것이다. 그 근거란 바로 믿음에 기초한 희망과 사랑이다.



십자가와 하느님


4. 그런데 몰트만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도대체 예수를 버린 하느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는 너무나 쉽게 하느님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진정 우리가 고백하는 하느님은 어떤 분일까. 고뇌 없이, 하느님과 싸우지 않고 고백하는 우리의 신앙고백은 많은 경우 우상숭배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사실 사랑의 고백, 신앙의 고백은 인격에 기초한 실존적 결단이며 전존재를 건 위탁의 행위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에게는 그러한 진지성, 철저성이 결여되어 있다. 죽음 앞에서 읊조리는 마지막 기도와 손짓, 그것은 일생에 단 한번일 수밖에 없다. 그런 기도는 십자가의 죽음에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어떻게 매일 죽을 수 있는가. 때문에 예수의 십자가는 우리 삶의 원형으로 우뚝 서 있다.


그렇다. 우리 삶의 역사적 모형, 예수의 십자가는 바로 모형이다.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죽음의 간접체험이라고나 할까. 성서의 전승과 예배, 또는 미사가 바로 그 체험의 공유를 위한 전례의식이다. 몰트만은 예수를 버린 하느님을 삼위일체의 사랑의 관계, 그 연대성으로 설명하며 이 난제를 극복하고 있다. 즉 자식의 고통을 멎게 하지는 못하지만 자식과 함께 아파하는 부모, 아니, 오히려 자식보다 더 큰 아픔을 느낄 부모의 마음을 통해 유비적(類比的)으로 설명하고 있다. 예수를 버린 하느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당한 그 예수와 함께 고통받고 아파하신 분이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은 바로 인간의 고통과 무관하신 분이 아니라 그 고통을 함께하며 함께 아파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몰트만은 계속 ‘예수의 십자가는 하느님 자신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묻고 있다. 이에 대해 몰트만은 P. Althaus의 ‘예수는 우리를 위해 죽기보다는 하느님을 위해서 죽었다’는 함축적 표현을 인용하면서 개신교권의 새로운 주장과 함께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는 전통적 가르침 곧 그 대속적 의미의 한계를 자인하고 있다. 그런데 가톨릭의 K. 라너는 예수의 죽음으로 ‘우리의 죽음이 불멸의 하느님 자신의 죽음이 되었다’고 술회함으로써 예수의 죽음을 ‘하느님의 죽음’으로 이해하였다. 때문에 ‘예수의 죽음’이 바로 하느님께 대한 진술이 된다는 것이다(몰트만, 십자가, 206-207쪽). 말하자면 십자가는 하느님의 신비를 푸는 만능열쇠(master key)인 셈이다. 사실 십자가의 예수는 죽음의 고통을 이긴, 희망의 표징으로 우뚝 서서 사방을 지향한다. 즉 십자가는 관계 자체다. 하늘과 땅, 인간과 세상, 인간과 권력, 그 모든 것이 관계되어 있다는 선언이다.



십자가의 전도적 힘


 


5. 루터는 중세 상황에서 이 십자가에 자신의 존재를 걸었다. “십자가는 모든 것을 시험한다.” 십자가의 시각에서 루터는 당대의 교황과 교계제도를 넘어섰고 그리고 인간의 자유를 선언했다. 십자가는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부수는 하느님의 무기다. 얼마 전 상영되었던 문제의 영화 <사제(Priest)>의 주제를 나타내는 첫 장면은 많은 것을 암시해 준다. 인사권의 남용 등 교회적 모순에 항의하여 큰 십자가를 들고 주교를 향해 돌진하는 한 사제와 허둥지둥 피해 쫓기는 주교의 모습은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점을 시사하며 반성케 한다.


그런데 2000년 희년을 앞두고 타종교에 대한 존중과 갈라진 그리스도교회와의 일치를 위한 기도를 올리고 있음에도 루터의 역사적 항변에 대한 교회의 단죄는 여전히 단호하다. 왜냐하면 W.C.C가 루터에 대한 파문 철회를 요구하고 있지만 가톨릭은 이에 응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여전히 가톨릭의 사제라는 논리다. 그런데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86년 신앙교리성은 <자유와 해방>이라는 공식문서에서 자유를 위한 루터의 행적을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1장6항).


자유는 성서에 기초한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 역사적, 제도적 교회의 한계를 넘어서는, 하느님께서 보장하신 신성불가침의 영역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규범과 규제, 법논리로 일관하는 교구행정은 예수의 이 십자가 앞에서 시험되어야 한다. 아니, 법 일변도의 교회 관료행정은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 그리고 신음하고 울부짖어야 한다. 상명하달의 현 체제는 결코 예수의 십자가에 기초한 평등한 제자직의 교회공동체의 본래 모습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과 소유욕으로 일그러진, 예수가 거부하고 사도 바오로가 폐기한 율법에로의 퇴행이다. 법조문이 강조되는 그 만큼 신앙은 위축되고 의로운 많은 이들이 계속 십자가에 못박힌다. 할례의 법을 넘어선 믿음의 자세, 그것은 자신의 원욕을 비롯한 세상의 모든 것, 교회의 것까지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는 결단이다.



십자가가 지닌 고발, 심판 그리고 해방의 의미


 


6. 십자가와 함께 여러 부류의 사람이 형성된다. 못박는 자, 못박히는 자, 그리고 바라보는 자, 함께 아파하는 자, 외면하는 자 등이다. 때문에 십자가는 심판의 의미를 갖는다. 십자가는 사람을 분류하기 때문이다. 우리시대에도 여전히 십자가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 십자가 앞에 서 있는 자리는 각각 다르다. 바로 이 다른 자리가 그 사람의 구원을 판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가난에 대한 해방신학의 이해와 분석인 비참한 가난, 자원적 가난, 투신적 가난을 생각해 보자. 첫째, 비참한 가난을 우리는 거부한다. 그것은 마땅히 극복되어야 한다. 사람을 비참하게 만드는 가난은 인간을 비인간화한다. 가난은 그 자체로 결핍이다. 그것은 저주의 표지다. 둘째는, 자원적 가난이다. 승려와 수도자의 가난, 자발적으로 택한 복음적 가난이다. 우리는 이러한 가난을 예찬한다. 욕심을 제어하고 사람을 순수하게 만드는 영적인 힘을 지닌 이러한 가난을 노래한다. 셋째로, 구띠에레즈를 비롯한 많은 해방신학자들은 실천적 가난, 곧 투신적 가난을 생각했다. 여기서 이들은 도대체 비참한 가난과 자원적 가난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둘의 관계는 어떠한가, 가난이 저주의 표징이며 동시에 예찬의 표지라면 그들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자원적 가난이 비참한 가난에 대해 무슨 의미를 지녔는가. 여기서 내린 구띠에레즈의 결론은 모름지기 자발적 가난은 비참한 가난을 퇴치하고, 불의와 맞서 싸우는 저항, 곧 투신적 가난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참한 가난을 퇴치하는 자발적 가난, 바로 그것이 투신적 가난, 불의와 억압과 맞서 싸우는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삶이라는 것이다. 믿음이 곧 실천이라는 복음적 선언을 바로 지금 이곳에서 구체화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 해방신학의 원리다.


십자가를 가난과 연계하여 생각해보자. 첫째, 분명히 그것은 형틀이다. 사람을 죽이는 도구다. 고통과 억압의 도구다. 그것은 곧 불의와 고통, 죽음과 같은 뜻이다. 그것은 마땅히 거부하고 퇴치해야 할 불의이기도 하다. 그러나 한편, 사람을 살리는 십자가가 있다. 자원적 십자가, 예수의 십자가다. 하느님의 아들이시지만 스스로 낮추시고 사람이 되시고(강생)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명하신 분(비하, Kenosis), 때문에 하늘에 올라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시고(영광), 모든 이를 구원하시고 심판하실 그분이 지셨던 십자가 말이다. 여기서 십자가는 곧 예수와 동일시된다. 때문에 사람이 짊어진 십자가는 이제 그리스도의 십자가, 하느님의 십자가로 변모된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인간의 십자가를 함께 지신 하느님을 체험한다. 이때 십자가는 하느님의 반영이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모상인 인간은 하느님의 반영인 십자가 때문에 하느님의 더욱 큰 신비를 체험한다. 여기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세번째 의미의 십자가를 만나게 된다. 투신과 저항의 십자가 말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를 경배하며 십자가의 기도를 올리고, 십자성호를 긋고, 십자가를 찬미하면서 십자가에 짓눌려 있는 이웃, 불의한 십자가 아래 죽어가고 있는 형제자매들을 외면한다면 형식적 신앙, 허구적 신심이 아닐까. 때문에 우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권력자의 횡포와 불의를 고발하고 퇴치해야 한다. 숱한 무죄한 이들의 억울한 죽음과 순교자들의 피값을 요구해야 한다. 국가의 법, 제도, 공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불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해야 한다. 그래서 다시는 이와 같이 억울한 죽음, 억울한 희생이 없도록 외쳐야 한다.


십자가는 물론 개인적 정화와 구원의 힘을 지닌다. 온갖 고통과 희생을 감수하고 인내를 더하고 본능과 욕구를 제어하는 수덕적 원형의 힘을 지닌다. 그러나 십자가는 개인적 영역을 훨씬 넘어서는 사회적, 우주적 힘을 지니고 있다. 십자가는 불의와 폭력에 대한 거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무서운 심판의 힘을 지닌다. 십자가의 예수는 개인적 차원에서 고통을 감당할 힘을 준다. 고통에 대한 욥기의 해석을 되새겨 보자. 의인의 고통, 또는 무죄한 이의 고통은 무엇인가. 그 고통에 대한 해석도 각각 다르다. 흔히 전통적 해석은 고통은 죄의 결과, 누군가의 잘못에 대한 벌로 이해해왔다. 고통에 대한 이러한 전통적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 욥기의 교훈이다. 의인도, 무죄한 이도 고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고통과 죄는 전혀 무관할 수 있음도 암시한다. 그리고 고통 앞에 원망하고 항변하는 모든 이의를 잠재운다. 생명을 거저 받은 인간은 때로는 고통도 감수할 수 있는 겸허함을 지녀야 한다는 교훈이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는 동시에 불의한 구조, 불의한 정치권력 앞에 이의를 제기하며 이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이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됨을 항변하고 외치고 있다. 십자가는 정의를 재촉하는 하느님의 표지판이다. 바로 이것이 정의의 십자가가 아닐까.



십자가, 동고동락의 표지


7. 십자가의 길 제5처에서 시몬은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있다. 시몬의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루가복음에 의하면 그는 강압적으로 예수의 십자가를 짊어졌다(루가 23,26 – 그들은 예수를 끌고 나가다가 시골에서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던 시몬이라는 키레네 사람을 붙들어 십자가를 지우고, 예수의 뒤를 따라가게 하였다). 결과적으로 시몬이 예수를 도와 십자가를 짊어졌다는 것은 단순한 고찰이다. 어쨌든 비록 그가 강압에 의해 십자가를 짊어졌지만 적어도 그 동안 예수는 무거운 십자가의 짐에서 해방된다. 이것은 사는 동안 우리도 이와 같이 강압적 요구에 의해 힘겨운 일을 당할 수 있지만 나의 힘겨움이 다른 이에게 휴식과 회복의 계기가 된다는 교훈을 준다. 어쨌든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바칠 때마다 시몬을 노래하고 시몬과 같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겠다고 다짐한다.


성당에서 올리는 십자가의 길은 상본 또는 조각으로 제작된다. 그리고 각 작품은 세련된 예술품이다. 그 작품을 바라보며 때로는 눈을 감고 우리는 십자가의 삶을 묵상한다. 지금도 예루살렘에는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를 가셨다는 길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바친다. 그 길은 행인들의 길이다. 삶의 현장, 시장 골목, 일상의 자리다. 우리의 삶, 우리의 길, 바로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다. 골목에서 무거운 짐을 끌고 가는 사람, 세상에서 시달리는 사람, 불의한 사회구조와 잘못된 법행정에 의해 고통받는 사람, 이들이 바로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진 우리의 많은 이웃들이다.


이들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지 않는 한, 우리의 십자가의 길 기도는 한낱 관념의 기도일 뿐이다. 그것은 공허한 상념일 뿐이다. 십자가와 예수와 시몬, 이러한 삼각구도에서 우리는 또한 우리 현실을 진단하고 새로운 실천을 다짐해야 한다. 십자가의 길 기도는 바로 나눔과 실천, 불의에 대한 항변과 근원적 개혁을 꾀하려는 우리의 다짐이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결의에 대한 구체적 동의다. 그것은 실천이고(마태 7,21), 미소한 자에게 베푸는 사랑이며(마태 25) 그리고 강도 맞은 사람을 돌보는 행위(루가 10)다.


십자가는 인간 삶의 조건이며 필연적 상황이다. 때문에 십자가는 수락의 대상일 뿐이다. 인간은 한계적 존재기 때문이다. 개인, 사회, 교회, 민족, 이 모든 삶과 조건이 바로 십자가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십자가를 수락해야 한다.

십자가는 권력의 우상을 부순다


8. 십자가는 고발의 의미를 지닌다. 군인들은 예수의 옷을 벗겼고 초와 쓸개를 마시게 했다. 참으로 모든 것을 빼앗긴 철저한 비움과 투명한 삶이다. 이와 같이 십자가는 모든 가식과 허물을 벗기고 모든 것을 공개한다. 그런데 우리의 십자가, 성당의 십자가는 그렇지 않다. 조금은 가리워졌다. 이것은 교회 스스로 그 한계를 드러낸 자화상이며 무엇인가를 가리고 감춘 교회 자신의 투명치 못한 모습을 암시한 것이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인간 자신의 한계, 그 은폐성에 대한 솔직한 고백이기도 하다. 세례 때 물 속에 잠김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것을 나타낸다. 세례와 모든 것을 벗기는 십자가는, 권력의 실체를 벗기는 힘을 지닌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빈 무덤도 바로 이것이다. 벗김과 투명과 빈 무덤은 상통된 개념들이다. 십자가 앞에 정직한 교회는 죄인임을 고백하는 교회이다. 사실 교회의 참모습은 자신의 모든 것을 열고 모든 정보와 소유를 함께 나누는 공유의 삶을 통해서만 확인된다. 전근대적이며 권위주의적인 교회행정과 독선의 처사는 십자가의 교훈을 상실한 불신과 우상의 한 형태일 뿐이다.

Ⅱ. 십자가와 정의



십자가, 구원, 정의로움


1. 십자가는 역설의 상징이다. 사도 바오로의 설명이 이를 말해 준다.


“유다인들은 기적을 요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지혜를 찾지만 우리는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선포할 따름이다.”(I고린 1,22-23) 십자가는 모순이다. 불의의 결과다. 때문에 십자가는 진실을 지향하고 정의를 요구한다. 아니, 십자가는 바로 진실과 정의의 대명사다. 세상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징표로서 그 모순과 불의를 과감하게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의 위력이라고나 할까. 십자가는 정의를 부른다. 십자가의 하느님은 정의의 하느님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정의의 개념은 십자가와 같이 관념화되기 일쑤다. 그뿐 아니라 정의의 하느님을 고백하는 그리스도인임에도 불구하고 불의 앞에 침묵하는, 사실상 정의를 외면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접하게 된다. 아니, 더욱 정확히 말해 교회마저 정의의 바른 개념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정의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정의의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은 곧 원죄로 인해 ①하느님과 깨어진 관계 – 인간의 불의로 인해 생긴 불화와 분열 ②인간 서로의 관계가 깨어진 불신의 관계 –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는 불의 ③고통과 함께 피땀 흘리는 현실 – 고통과 죽음, 자연의 도전 앞에 선 인간을 본래의 자리로 회복하는 일이다. 우리는 바로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구원의 실현을 확인했다. 이것은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자연과 함께 이루어지는 3중의 회복이며 이 구원을 우리는 정의로워지는 일, 곧 의화(Justificatio)라 부른다. 사실 정의는 하느님의 본질적 속성이며 구원의 핵심적 요소다.



2. 그러나 핵심적 요소인 정의는 늘 논란의 대상이며 교회 안에서도 뒷전으로 밀린다. 십자가의 철저성을 이해하지 못하듯 정의의 완전성을 깨닫지 못한 것은 아닐까. 정의는 질서의 기초다. 제자리에서 제 방향으로 움직이는 모든 것의 총화다. 정의는 바로 진선미의 종합이다. 그런데 진선미의 종합이 과연 이루어질 수 있는가. 정의의 실현은 어차피 이상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우리는 정의를 꿈꾸고 정의를 지향해야 한다. 비록 부분적이라 해도 정의를 실천하고 그것을 기초하여 전체를 이해하고 전체를 포착하고 전체적 실현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인간은 노력하는 만큼 완전해지고 정의를 추구하는 그 만큼 정의로워지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바로 하느님 정의를 고백하고 의로운 존재로 확인 받는 결과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따르며 선행을 실천하고 있다. 정의가 우리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정의는 무엇인가. 정의는 하느님의 대표적 모습이다. 때문에 정의는 사랑과 자비, 자유와 책임, 심판과 용서 등 하느님의 모든 속성과 관계되고 하느님의 권능을 두드러지게 드러낸다. 때문에 정의는 그 자체로 복합적 의미를 지닌다. 아니, 정의와 사랑은 바로 한 실체의 양면 관계다. 때문에 정의가 없는 사랑은 본능이며 사랑 없는 정의는 폭력이라는 주장이 가능한 것이다. 하느님을 고백하는 만큼, 사랑과 자비의 실천을 외치고 다짐하는 그 만큼 우리는 정의를 고백하고 정의를 외쳐야 한다. 아니, 우리의 신앙고백은 그 자체로 정의에 기초한 사랑과 자비,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찬미여야 한다. 정의는 또한 예수의 십자가 죽음에 대한 그 이유와 과정을 철저히 묻고 따져야 한다. 정의실현의 가시적 방법은 재판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체험하듯 정의로운 재판관의 판결은 누구에게나 설득력을 주며 더구나 죄인 그 자신이 잘못을 시인하며 개선을 다짐한다. 정의는 인간을 회개로 이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의 이유를 따지지 않고 우리가 구세주 예수를 고백한다면 많은 경우 우리의 신앙고백은 맹종과 맹신 등 사적 신심에 기초한 건강치 못한 모습이기 일쑤다. 우리는 끝까지 묻고 따져야 한다. 육하(六何)원칙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그 이유와 동기만은 끝까지 물어야 한다.



십자가의 본질, 정의의 선포


3. 묻고 따지는 행위는 피곤하고 부담을 준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사람이 죽었는데, 아니, 하느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는데 묻지 않을 수 있는가. 더구나 그분은 어떤 죄도, 잘못도 없으시다는 데도 유다인들의 종교재판을 통해서 그리고 로마총독의 재판을 통해 사형수로 확정되어 십자가에 처형되었다. 왜 그랬을까? 유다인들이 내세운 사형요구의 근거는 무엇이었을까? 로마총독이 사형을 확정한 법적 근거와 처형 이유는 무엇인가. 끝없는 물음이 솟구친다. 그러나 우리는 유다인들의 기소장과, 로마총독의 판결문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는 복음을 통한 예수의 수난기록과 신앙고백록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 중 기록상 가장 먼저 집필된 원문의 전승에 가장 가깝다는 마르코 복음을 보자(14장). 큰 축제 이틀 전에 음모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다름 아닌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의 법정살인 음모였다. 그런데 두려움이 있었다. 백성들의 소동을 두려워했다. 그렇다. 이 세상에는 어디에나 음모가 있다. 권력자들의 음모, 합법을 가장한 음모가 있다. 법과 질서 곧 정부와 국회, 법원과 검찰, 행정과 명령을 통한 음모가 상존해 있다 음모자들은 늘 공개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백성들의 소동을 두려워한다. 소동이란 의사표시와, 이의제기로 오늘의 데모와 같은 뜻이다.


그리고 익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여인, 이 여인은  3백 데나리온이 넘는 향유를 썼다. 분개한 사도들도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여인을 칭송하며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자의 행업이 기억되리라 선포했다. 그런데 여인의 행업은 잊혀졌다. 여인의 행업은 예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은 일이다. 그것은 곧 예수를 그리스도, 메시아, 구세주로 고백한 행위다. 이는 로마 황제는 결코 신이 아니며 구세주도 아니다는 거부와 저항의 뜻이다. 이것은 엄청난 도전의 힘을 지닌 목숨을 건 신앙고백이었다. 이러한 신앙의 여인을 복음사가와 사도들도, 교회도 익명으로 처리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다른이의 용감하고 훌륭한 것을 감추고 은폐하는 거짓된 인간의 속성은 어느 곳에도 엄존한다는 고발이라 생각된다.


그리고 유다는 예수를 배반하고 돈을 받기로 약속한다. 오늘도 우리 사회의 부정부패의 핵심은 결국 돈이다. 식탁에 함께 한 배반자 유다, 참으로 무거운 저녁식사다. 그러나 마지막 식사이기에 진지한 시간이다. 예수께서는 식사 때마다 자신을 기억하라고 당부하셨다. 술잔도 드셨다. 이것은 사도교회 당시, 나름대로 모여 거행하던 전례의식의 확인이기도 하다. 사실 미사를 우리는 최후의 만찬의 기억과 반복이라 하는데 그 최후성과 유일회성의 진지함이 늘 생생하게 살아있는지 죄송한 생각이든다. 왜냐하면 “잘 들어두어라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는 결코 포도로 빚은 것을 마시지 않겠다”(마르 14,25)는 말씀이 너무도 무색하게 우리는 매일 포도주를 봉헌하고 축성하고 마시고 있으니 말이다.


몰트만은 미사, 즉 그 제사성에 대해 근원적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미사의 기억과 반복은 십자가 예수의 죽음의 그 유일회성을 오히려 훼손하지 않느냐는 주장이다. 때문에 그는 반복이 아닌 선포의 의미를 강조한다. 십자가는 유혈의 제사이고 미사는 무혈의 제사라 하는데 이 점은 다시 되새기고 고찰해야 한다. 사실 나는 사제로서 여행중에 제병, 포도주, 성작을 지참하고 다니며 어느 곳에서든지 미사를 봉헌한다. 그러니 결코 주일미사를 궐할 일이 없다. 그러나 신자인 경우에는 아무리 미사 참례하기를 원해도 성당을 못 찾으면 미사를 궐하게 되고 이러한 경우 성서묵상 등 대송기도를 통해 그 의무를 채울 수 있다고는 하나 그래도 여전히 찜찜한 마음을 갖게 마련이다. 미사를 독점하는 사제와 공유의 기회를 갖지 못한 신자 사이의 차별은 과연 십자가 앞에서 정당한지 되물어야 한다.


성금요일은 예수 수난 기념일이다. 그런데 이날만은 미사를 봉헌치 않고 말씀의 전례, 신자들의 기도, 십자가의 장엄한 경배의식을 거행한다. 영성체 예식이 있지만 그래도 미사봉헌은 아니다. 예수의 죽음을 장엄하게 기억하는 성금요일의 이 전례와 주일미사와의 근원적 차이는 무엇일까? 성체축성이 미사의 근본이며 핵심일까? 이것은 우리가 진지하게 깊이 숙고하고 묵상할 주제다. 1년에 단 한번 장엄하게 거행하는 성금요일의 전례이기 때문에 그 예식이 더욱 감동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성금요일의 예식도 매일, 매주일 똑같이 반복한다면 그 진한 감동의 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문제는 성금요일 전례의 신학적 의미가 보다 분명히 규명되어야 한다. 미사와 십자가 전례, 미사와 최후의 만찬, 십자가전례와 최후의 만찬 등 그리고 특히 미사가 십자가제사의 반복이라면 성금요일 전례의 십자가 경배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몰트만의 지적을 진지하게 수렴하며 십자가 예수의 죽음의 원모습을 함께 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십자가의 선포는 곧 정의의 선포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정의가 묻는다


4. 이와 같이 십자가와 정의는 기존의 틀에 끊임없이 물음을 제기하게 한다. 과연 그것이 십자가 앞에서 떳떳한가. 그리고 모든 면에 있어서 정의로운가. 이 물음 앞에 사람은 누구나 머리를 숙이게 된다. 겸허한 자신을 고백하게 된다. 십자가와 정의를 논함은 진실한 자기자신, 역사와 민족 앞에 솔직한 교회의 모습을 재정립하는 일이다.


사실 정의구현사제단은 지난 25년 동안 나름대로 현실사회에 직면한 문제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 예언적 사명을 수행해 왔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그 적극적 자세로 대체로 긍정적 평가를 받아왔다. 그러나 거기에는 엄청난 비판과 부정적 평가가 있었음도 겸허하게 인정한다. 교회내의 사정도 한가지다. 이것은 분명 사제단의 한계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한국교회의 한계며 나아가 우리 민족현실의 한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 솔직하게 역사적 정의, 현실적 정의, 그리고 무엇보다도 상식적 정의 앞에 서서 모두 함께 반성해야 한다. 참으로 모든 일에 있어서 정의로웠는가. 아니면 적어도 정의로워지려고 관심을 갖고 노력했는가. 자기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않고 남의 눈에 있는 티끌을 들추어내는 위선자는 아닌지, 죄 없는 사람은 돌로 쳐라 하신 예수의 말씀 앞에 머리 숙이고 피할 수밖에 없는 죄인일 수 있음도 고백한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다르다. 아무리 제 눈에 들보가 있다 해도, 아무리 자기 자신이 큰 죄를 지었다 해도 그것이 결코 다른 이의 티끌과 작은 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다. 그런데 하물며 사회적 불의, 구조적 악, 조작과 음모, 합법을 가장한 공권력의 범죄 앞에 침묵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더 큰 위선이며 기만이다. 정의의 요구 앞에서 사랑과 자비를 강조할 수는 있다. 그러니 우리는 그 배경과 진의를 물어야 한다.


7,80년대의 암울한 유신독재 시절 그리고 광주의 학살 등 비극의 현실에서 정의에 기초한 우리의 강론은 많은 경우 신자들에게 부담을 안겨주기도 했다. 때로는 항변도 제기되었다. 나는 항변하는 그 교우에게 그가 서있는 자리를 물었다. 어느 자리에, 어느 편에 서 있는가 하고, 유신독재의 편에 서 있는가, 아닌가. 광주학살자의 편에 서 있는가, 아닌가. 그는 그런 것은 모른다고 했다. 관심도 없다고 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성당에 와서 마음만 편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세상의 사건을 들으면 머리가 아프고 신앙에 회의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그에게 성서를 적어도 한번 읽고 묵상했는가를 물었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가르침, 문헌을 한번이라도 읽어 본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나는 그에게 당신이 세례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적어도 성서는 읽고 묵상해야 하지 않는가. 그리고 나는 십자가의 예수를 가리켰다. 나도 이웃의 고통, 현실문제에 눈감고 싶다. 교우들과 함께 재미있게, 단체들과 함께 기도하며 성지순례 또는 야외행사만 참여하고 싶다. 그리고 교우들과 함께 나름대로 안주하고 싶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나를 재촉하고 나를 흔들어 깨운다. 너의 벗이 매맞고 죽어가고 있는데, 네 이웃들이 신음하고 있는데, 불의한 공권력자들이 민중을 짓누르고 있는데 너는 지금 어디 있는가 하고. 감옥의 지학순 주교, 감옥의 청년학생들 그리고 법정에서, 길거리에서 옥바라지에 뛰고 있는 가족들을 보면 십자가 밑에 서 계신 성모마리아의 모습이 떠올라 정신이 번쩍 든다. 예언서의 말씀이다.



“나 야훼가 너를 부른다.


정의를 세우라고 너를 부른다.”(이사 42,6)




“내가 기뻐하는 단식은 바로 이런 것이다.


억울하게 묶인 이를 끌러주고,


멍에를 풀어 주는 것,


압제받는 이들을 석방하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버리는 것이다.


굶주린 이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것이다.”(이사 58, 6~7)




“이 사람아,


야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덕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미가 6,8)


기존의 틀과 고정의 관념을 깨는 십자가와 정의


5. 자선과 복지의 논리는 비교적 단순하다. 도와주면 된다. 인도의 마더 데레사는 자선과 사랑의 대명사다. 물론 아름답고 장한 분이다. 그런데 그의 장례식에 대해 한 노동전문가가 냉정하게 비판했다. 그 화려한 장례식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낸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그가 생전에 그토록 돌보던 가난한 사람들인가, 아니면 그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경시한 권력자들인가. 그들은 노동자들을 핍박하고 임금을 착취한 재벌들이 아닌가.


누군가 비유로 말했다. 사랑과 자선이란 불의한 사회, 구조적 악이 만들어낸 쓰레기를 치우는 작업이라고. 물론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정의와 해방은 그 쓰레기의 주범인 이 사회의 구조 악, 잘못된 제도와 관행을 문제 삼고 근원적으로 쓰레기를 줄이는 일을 고민하게 한다. 쓰레기를 아무리 치워봐도 끝이 없다. 문제는 그 쓰레기를 최소한으로 줄이는 일이다. 여기에는 물론 수고가 동반한다.


그러나 힘든 일이 이것뿐인가. 그리고 이 세상에 어디 거저 되는 일이 있는가. 모든 것이 노력과 땀의 대가가 아닌가. 물론 거저 받은 것도 있다. 이 세상, 생명, 자연 등. 이 모든 것이 거저 받은 은총이다. 그러나 보화의 비유에서 보듯이 하느님의 은총도 노력을 통한 이윤을 요구하고 있다. 이윤추구를 위한 노력은 최선을 다하라는 교훈이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정의를 위한 노력이어야 한다. 그러나 정의 문제에는 논란이 생긴다. 정의는 십자가를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결별, 자기희생, 철저한 자기 비움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신학의 진전은 고정된 틀을 깨도록 우리를 이끈다. 신관도 교회관도 한가지다. 사실 가부장적, 배타적 유일신관은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를 가부장적 배타적 종교로 형성했다. 때문에 무엇보다도 바른 신관, 건강한 신관 정립이 요구된다. 바른 신관 정립은 바른 공동체 곧 교회적 삶에서 형성된다. 따라서 우리는 정의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정립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관의 변화와 진전된 모습을 살펴보자. 역사와 문화가 진전하듯 교회적 삶도 사람의 문화에 따라 보다 높고 넓은 가치에로 진전하기 때문이다.


도날 도어의 종합을 살펴보자. 20세기, 아니 지난 천여년간에 교회사적으로 가장 큰 사건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를 통한 변화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발상의 전환을 통해 교회가 개방적 자세를 지니고 겸허하게 봉사를 다짐했기 때문이다. 도날 도어는 이즈음 변화된 교회의 모습을 네 단계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다.


첫째로 바티칸공의회 이전의 교회상은 자못 전투적이며 폐쇄적, 일방적이며 독단적이었다. 사실 많은 이들이 언급하고 지적한 대로 이때의 교회는 피라밋형이라는 것이다. 로마제국, 봉건왕조, 상명하달의 군사문화, 대체로 이런 식을 특징으로 한 교회상은 단순한 의식의 신자를 배출한다. 명령과 복종, 신앙을 통한 순종만이 미덕으로 예찬되던 시기이다. 물론 여기에도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이 있지만 이러한 교회문화 속에는 독창성과 도전 등의 개성은 매몰되고 제도적 형식과 교회법이 우위를 차지한다. 당시 신학교의 교회법 강의시간이 성서보다 많았다는 것이 바로 이를 말해주고 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초월적 신관과 이른바 내적 신심의 지배적 경향이 당시의 교회를 주도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연스럽게 도피주의적 영성과 함께 세상의 문제에 무관심한 결과를 초래한다. 특히 정치적 문제라 판단되는 경우에는 외면하게 된다. 물론 당시 한국교회의 사목자들이 프랑스 선교사들이라는 점도 관계가 있었지만 일제치하의 한국천주교회가 취한 친일 행적과 태도는 너무나 부끄럽고 죄스러운 일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의란 사적영역, 개인적 관계에서만 언급될 뿐 공동선이나 구조적 사회악, 국가의 범죄에 대해서는 전혀 관계없는 관념에 불과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사회정의와 함께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교계제도에 앞서 서술하고 있다. 이것이 두번째 유형의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이다. 특히 교회헌장에서는 세례에 기초한 평등의 원리, 순례자의 자세, 무엇보다도 하느님 백성을 위한 교계제도의 봉사직 그리고 함께 이룩해야 할 교회의 공동체성이 강조되었다. 교회론의 혁명이라고나 할까. 흔히 지난날의 교회는 성직자 중심의, 성직자 전유의 교회라는 비판을 받았다. 교회헌장은 이런 맹점을 해결하고 하느님의 반영인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신비체이며 이 신비체는 역사적 현장에서 모든 백성을 포괄하고 있음을 선언했다. 아니, 교회는 바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순례자의 모임이라 했다. 이 모임은 그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모든 종파와 인종,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수용하는 개방적 공동체임을 강조했다. 넓고 큰 시각은 종교와 인간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


이와 함께 셋째 단계는 사목헌장의 특징인 세상을 향한 교회, 세상 한복판의 교회다. 교회의 현주소가 바로 이 세상이다. 선교와 복음화의 개념도 확대되어 세상을 위한 봉사와 개혁, 인간적 삶을 위한 일체 노력이 바로 복음화임을 확인하고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전 세계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교회가 관심을 갖고 특히 모든 부문에서 정의가 기초가 되도록 선포하고 있다. 정의의 실천이 바로 교회의 소명이며 인간화 작업이 바로 복음화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네번째 현 단계는 1968년 남미의 메델린 문헌을 모형으로 한 교회공동체의 모습이다. 즉 이때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for)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의(of) 교회로 그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질적으로 진전하는 시기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The preferential option for the Poor)이란 해석과 선언은 교회의 자기 성찰을 통한 투신의 다짐을 일깨워 주고 있다. 해방신학으로 대표되는 남미교회의 이 운동은 20세기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획기적 사건이었다.


물론 이와 함께 앞으로는 아시아,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펼쳐질 새로운 문화구조와 여성이 중심이 되고 평신도가 중심이 되는 새로운 공동체 문화 속에서 교회는 더 이상 기존의 본당구조와 같은 행정의 단위가 아닌, 참으로 같은 뜻을 지닌 형제 자매들의 끈끈한 모임인 동지적 교회(Intentional christian community, I.C.C)가 더욱 뿌리내릴 것이라는 예측과 전망이 보인다. 어쨌든 지금의 우선적 가치는 약자와 함께하는, 정의를 세우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차별은 물론 일체의 차별을 타파하는 평등과 자유의 실현이다.


문제는 교회론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조화하고 종합하는 일이다. 도날 도어는 기차를 비유로 이해를 돕고 있다. 교회 기차는 첫 정류장을 떠나 둘째, 셋째 정류장에 잠시 멈추었고 다시 넷째 정류장을 지나 다음 정류장을 향하고 있는데 어떤 이들은 기차가 떠난 줄도 모른 채 첫 정류장에 여전히 머물러 있고, 어떤 이들은 둘째와 셋째 정류장이 종착역인 줄 알고 그곳에 내려 안주해 있다는 것이다. 때문에 교회론의 주장도 십인십색이다. 그런데 십자가의 사건, 그 유일회적 구원과 심판 앞에서도 십인십색일 수 있는가? 아니다. 그렇지 않다. 십자가의 전도적 힘 앞에, 예수의 정의 앞에 우리는 분명히 하나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 목숨을 거는 일이다. 하느님을 위해, 신앙을 위해 목숨 걸어야 한다. 그것은 곧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이다. 이러한 결단은 발상의 전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결별과 비약이다. 그것이 바로 회개가 아닌가. 로마의 백인대장은 예수의 죽음을 보고 그 엄청난 종말론적 의미를 터득한 뒤 ‘이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이었구나’ 하며 감동하고 믿음을 고백했다. 아마 오늘의 교회, 다양한 교회론의 주창자들도 결국 예수의 죽음, 그 십자가 앞에서만 비로소 하느님의 의로우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과 히틀러, 무쏠리니, 스탈린과 같은 세계적 독재자와 김일성, 박정희, 전두환 등 국내 독재 통치자들의 억압과 핍박 속에서 비로소 십자가의 예수를 새롭게 체험했다는 숱한 증언자들의 진지한 고백 앞에서 우리는 일체의 선입견을 버리고, 모든 것을 버리고 순수하게 그리스도께 다가갔던 그들의 원체험을 다시 생생하게 일구어내야 하다. 교회론의 변화진전을 보면 결국 모든 것을 벗기운 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분의 모습에 단계적으로 그 시대 그 문화의 역사적 옷을 입힌 과정이다. 따라서 이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인위적으로 입힌 그 역사적 옷을 과감하게 하나씩 벗겨 하느님 앞에 알몸으로 서게 해야 하는 일이다. 이것이 참 회개이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과 역사 그리고 자신 앞에서 온전히 새롭고 자유스러워지는 작업이다. 고정된 틀을 깬다는 것은 통치 일변도의 국가와 법과 공권력의 남용을 제어하는 일이며 국가의 개념, 법과 통치의 질서,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갖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록 본의는 아니지만 계급적으로 운영되는 교회의 행정구조를 근원적으로 바꾸어 예수 그리스도의 평등한 제자직 공동체를 실현하고 그 원형을 복구하는 일이다. 정의는 가식을 벗고 평등을 이루는 참으로 근원적 개혁, 진실한 회개이다.

Ⅲ. 인간과 정의



다짐과 봉헌


1. 이 글을 쓰는 순간, 지금도 사제들은 국가보안법폐지를 지향하며 단식 중이다. 만 20일째다. 답답하고 안타깝고 마음이 무겁다. 단식이란 생명을 담보로 한 기도의 실천과 다짐이다. 강도 높은 기도다. 극기훈련이다. 아니, 모든 욕심을 떨쳐버리는 비움의 작업, 무혈의 순교, 십자가 고통의 체험 그리고 회개작업이다. 사제단 25주년 행사를 앞둔 사제들의 이 단식은 지난날의 삶을 반성하고 뉘우치는 자신과 이웃을 위한 정화의 기도며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감사 그리고 모든 이들을 위한 초대의 기도이다. 그리고 단식은 불의한 권력자들이 공권력으로 국민을 짓누르고 법의 이름으로 자행하는 제1폭력을 온몸으로 거부하는 비폭력 평화운동, 정의추구를 위한 저항운동이다. 십자가 앞에서, 죽음 앞에서 묵묵해야 하듯 우리는 사제들의 단식 앞에서 묵묵할 뿐이다. 그리고 참으로 국민이 주인인 그러한 나라, 그러한 정부의 실현을 지향하며 불순한 동기로 제정된 법들이 폐지되고 참으로 인간이 주체이고 목적인 그리고 상식과 진리, 무엇보다도 정의에 기초한 법이 설정되기를 바라며 우리의 삶을 묶어 하느님께 올린다. 그리고 지금 다시 참으로 겸허한 마음, 서품 때 제단 앞에 엎드려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이웃을 위하여 최선을 다 하겠다던 그날의 순수성과 정열을 되새긴다. 사제는 참으로 위타적 존재다. 사제는 그가 누구이든 도움을 필요로 할 때 어느때든 다가갈, 준비태세를 갖춘 응답의 사람이다. 사제는 이웃과 함께할 때에만 가치와 의미가 확인되는 존재이다. 이러한 자세로 기도 드린다.



하느님, 


이사야 예언자가 노래한 야훼의 종, 그 종의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


하느님께서도 버리신 그 처절한 처지의 깊은 뜻을 되새기며,


이 쓴 잔을 치워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더 큰 뜻이 있기에,


그래도 이 잔을 감수하겠다는 소박한 마음으로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하나뿐인 귀중한 이 목숨,


정말 더 살고 싶고 그리고 이 목숨 때문에


배신의 유혹이 가장 친근한 벗으로 혀끝에 다가오지만


그래도 신념과 사랑, 하느님과 맺은 그 약속과 다짐으로


목숨 바친 위대한 순교자들의 마음을 되새기며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겨레와 민족, 자유와 독립, 그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과 가정을 바치며 모범의 삶으로 귀감이 된


위대한 순국선열들을 기억하며 불타는 민족애를 확인합니다.




하느님, 


참으로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절,


아니다! 이것은 아니다!를 외치며 인권과 자유, 민주화를 위해


청년학생, 시민 그리고 사랑하는 모든 벗들 함께


세상 한복판에서 감격의 미사를 올렸던 교우들과 수도자,


이들의 기도를 반복해서 올립니다.




하느님, 


감옥에서 고문실에서 묶인 채 매맞고


넘어지며 숨져간 이 땅의 숱한 젊은 벗들,


분단의 벽을 부수며 민족의 동질성을 외치고 숨져간 많은 의인들을 기억합니다.


이들의 염원을 담아 주님께 기도드립니다.




하느님, 


이제 다시 저희는 “예, 제가 여기 있습니다”(Adsum)하고 대답합니다.


이웃의 부름이 당신의 부르심을,


약한 이웃, 어려운 이웃, 도움을 청하는 이들의 부름이, 교회의 부름임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겨레와 민족이 우리를 부르고 있음을


때문에 예수님의 삶을 바라보며, 십자가의 기도를 반복합니다.




하느님, 


모든 것을 당신께 맡깁니다.


하느님, 최선을 다했습니다.


당신 안에 쉬기까지 늘 이 약속과 기도에 충실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모든 벗들을 기억합니다.


당신께서 아시오니 갚아 주소서. 아멘.

다시 원점에서


2. 사제단 25주년의 삶에는 나름대로의 감격과 환희 그리고 고통과 아픔이 있다. 그리고 역사의 현장 그리고 그 이면에 하느님의 섭리와 손길이 함께하고 있음을 늘 뒤늦게 깨닫는다. 이것이 현장체험의 신앙고백이다. 신앙이란 새로운 다짐과 반복이다. 25주년을 맞는 우리는 소박한 마음으로 다시 원점에서 시작한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요한 14,12) 예수께서 수난 전에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이 하신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니 그것이 가능할까. 참으로 믿기 어려운 말씀이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도 예수님의 남은 고난을 자신의 고난으로 채우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하신 것보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고 또 마땅히 해야 한다. 믿음만 있다면 불가능은 없다. 사람은 참으로 창조적 존재다. 불가능을 뛰어넘을 수 있는, 아니 믿음을 통해서 믿음의 주체인 예수님 보다 더 위대해 질 수 있는 존재다. 사실 “너희는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마태 5,48)하신 복음 말씀과 같이 인간이 추구해야 할 목적은 완전과 무한이다. 곧 하느님이 되는 일이다. 완덕의 추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사실 우리는 가정과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 한복판에 더욱 깊이 들어가기 위한 방법이다. 그래서 세상 안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세상을 변혁키 위함이다.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세상과 새로운 관계를 맺음이다. 예수 강생이 바로 그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과 세상과 맺은 새로운 관계가 바로 강생이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도 바로 그것이다. 사람의 고통, 억울한 죽음까지 수락하면서 인간과 똑같이, 아니 가장 비천한 모습을 취하신 그분의 삶이 바로 이것이다. 25년의 삶은 우리가 참으로 비록 부분적이지만 출애급과 바빌론의 삶을 체득한 새로운 은총의 시간이었다.



시대의 손길, 하느님의 손길


3. 아브라함의 여정, 모세의 투신, 예언자들의 외침, 이 모든 성서적 삶은 지난 얘기가 아닌 바로 ‘지금 여기에서’ 재현되는 사건들이며 신앙인인 우리가 이 시대에 새로운 아브라함, 모세, 예언자가 되라는 요구이다.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이며 사제적 소명과 책임의식에서 하느님과 사제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는 ‘정의’에 초점을 맞추었다. 모든 것을 정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정의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정의구현을 지향하며 실천을 꾀하려 했다. 지학순 주교 등 203명의 의인들이 옥고를 치르고 재판받고 있는 현실에서 정의를 추구해야 할 사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시대적 물음 앞에 사제들은 분명히 자신의 신원의식을 갖고 이에 응답해야 했다. 그리고 시대의 손길이 바로 하느님의 손길임을 감지했다. 참으로 우리는 눈을 떴다. 세상을 새롭게 바라본 것이다. 십자가에 높이 달려 세상을 바라보라. 고문실에서 매맞으며 하느님을 생각해 보아라. 감옥에 갇혀 성서를 묵상해 보아라. 묶인 채 끌려다니며 법정의 죄인을 재판 받으며 예수님과 세상을 바라보아라.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참으로 어두운 시대가 하느님과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여 우리 사제들의 시야를 넓혀 주었다. 미사봉헌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우리는 불의한 권력에 의해 희생되는 우리 벗들의 피흘림을 생각하며 십자가 밑에서 형언할 수 없는 아픔으로 서 계셨던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의 심정을 헤아리게도 되었다. 제단의 미사, 성당 안의 미사가 감옥의 미사, 세상 한복판에서의 미사로 그 영역을 넓힌 것이다. 어느 곳이든 사제가 서 있는 그 자리가 바로 북음선포의 강론대임을 확인했다. 그리고 일의 우선순위, 가치의 우선순위를 새롭게 정립하게 되었다. 마태오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에 언급된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감옥에 갇힌 사람, 병든 사람이 참으로 누구인지, 루가복음  10장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께서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고 묻지 말고 네가 가서 바로 다른 사람의 이웃이 되어주어라 하신 실천적 답의 큰 뜻도 새롭게 깨달았다. 더구나 광주의 비극, 군인들에게 매맞고 끌려가는 그 참상의 현장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도와주었던 강인한 어머니들의 모습을 지며보면서 그 위험의 현장에 직접 다가가지 못한 우리 사제들이 바로 강도 맞은 사람을 보고도 외면한 복음의 그 사제, 그 레위인이었음을 깨닫고 겸허하게 고백한다.



감사와 봉헌


 


4. 사제단 25년의 삶에 많은 예찬이 있다. 이 모든 예찬을 익명의 시민, 학생 등 정의와 평화를 위해 애썼던 모든 분들께 드린다. 특히 하느님 나라의 가시적 징표인 수도자들의 정성된 기도와 함께한 증언의 삶에 감사하며 소명의 일체감을 확인한다. 이제 우리는 다시 1994년 사제단 20주년 기념모임의 주제인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를 기억하며 유다인 신학자 Marc Ellis가 제기한 물음을 상기한다. 사제들이 지난 세월 온몸을 다해 추구했고 투신했던 정의구현, 인간해방, 자유와 민주화운동, 그 결과 과연 득을 본 주체는 누구인가? 참으로 민중인가? 아니면 여전히 개혁되어야 할 제도와 구조인가. 국가와 온갖 제도 그리고 교회도 마땅히 ‘브로커 없는 하느님 나라’의 정신에 따라 근원적으로 변해야 한다. 십자가의 원리로 모든 것을 부수고 빈 터 위에 새로운 희망의 싹을 돋게 해야 한다. 빈 무덤 속에서 새롭게 부활을 체험해야 한다.


예수의 십자가 밑의 성모 마리아 등 경건한 여인들과 사도 요한, 이들 소수가 바로 교회공동체의 초석임을, 새벽 어두운 길, 두려움을 무릅쓰고 무덤으로 달려간 막달라의 마리아가 부활의 첫 선포자임을, 그리고 까따꼼바 지하묘소의 고난의 공동체가 바로 지금 우리 교회공동체의 역사적 모형이며 뿌리임을 되새기며 진솔한 삶을 다짐한다.


 반대자에게는 감동을 주는 겸허한 삶으로, 불의한 자에게는 두려움을 주는 정의로운 삶으로, 무관심한 이에게는 호기심을 주는 매력으로, 무딘 이에게는 자극을 주는 투신의 삶으로, 무엇보다도 약자의 벗이 되고 친구가 되는, 예수님과 같은 실천적 삶을 다짐하며, 모든 법과 규정을 능가하는, 사람의 아들이며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고 확인한 인간이 우뚝선 삶, 인간이 중심이 된 친교 공동체를 지향하고 고백한다.

십자가의 수락이 부활이다.


인간의 확인이 참된 신앙이다.


정의구현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다.


하느님, 자비를 베푸소서.  아멘.


< 참고서 >


 D. 도어(Dorr), <영성과 정의> 분도,  1990.


 Integral Spirituality,  Orbis Book,  N.Y,  1990.


 J. 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느님> 한국신학연구소,  1980.


 L. 보프,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 분도,  1996.


 A. 피어리스, <아시아의 해방신학> 분도,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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