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체투지 : 우리 말로는 삼보일배. 세 걸음 걷고, 엎드려 한 번 절하는 것.
티벳인들은 성지를 순례할 때, 오체투지로 성지를 순례한다. 세계의 지붕이라는 험산 히말라야 고산지대를 그냥 걷는 것만으로 힘들텐데, 그들은 오체투지로 성지를 순례한다.
라싸까지 이르는 먼 길을 고난에 가까운 고행을 견디며 티벳의 성지 라싸를 향해서 느리게 절하며 걸어간다. 가는 길의 험난함은 이루 다 말로 표현 할 수 없다. 이마는 시꺼머게 멍이 들어있고, 깔판으로 사용하는 손바닥의 두꺼운 나무 판자는 닳고 닳아서 몇 개를 사용했는지 셀 수가 없다. 가는 길은 수천미터의 고산지대. 눈이 다 녹지 않았고, 여정 도중에 눈보라와 비바람이 수도 없이 몰아친다. 잠자리에 누워도 허술한 천막은 세찬 바람에 흔들려 잠들 수 없는 굉음을 만들어내고, 밤이면 찾아오는 고산지대의 거센 추위는 입김마저 얼려버릴 기세다.
이런 고행의 여정을 동안 쉬지 않고 계속 한다. 작은 시내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시내 넓이만큼, 오체투지를 미리 행하고 건넌다. 강이 앞에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이들 앞에는 바다가 있어도 오체투지를 마치고 바다를 건널 사람들이다.
자신의 신앙에 대한 철저한 순종과 고난에 대한 순응은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태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이 세상에 다른 이름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종교만이 참된 진리라고 말하지만, 그 참된 진리를 믿는 사람처럼 살지 않는다. 그래서 기독교라는 이름이 기득권과 호사스러운 종교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대한민국 어느 도시를 가도 높은 교회 첩탑위 십자가는 밤하늘을 빨갛게 물들이지만, 대한민국 어디를 가도 참된 믿음을 만나기 어렵다. 하늘을 향해 수없이 치솟은 저 교회 첨탑은 인간의 욕망을 향한 믿음인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인가.
먹을 것 부족한 황량한 고산지대의 저 티벳인들의 마음에는 무엇이 있어서 부처님을 향한 저 숭고한 믿음이 자리잡은 것일까. 티벳에는 하늘 무서운줄 모르는 고층 건물도 없고, 풍요로움도 없으며, 그리고 참된 진리인 십자가도 없다. 그러나 저곳에서는 참된 믿음이 있다.
오체투지에 나서는 3명의 티벳인의 험난한 여정을 보면서, 자꾸만 눈물이 났다. 제 신앙을 위해 저 험난한 고난의 길을 기쁜 마음으로 순응하는 삶을 보아라. 기독교인이라 자처하는 내 삶의 무엇이 저들보다 낫단 말인가.
그들의 믿음은 태산이라도 옮기리라 말씀하신 믿음이었다. 숭고한 믿음이 무엇인지를 저들의 모습에서 보았고, 나에게는 없는 저 거대한 믿음에 감당할 수 없는 부끄러움과 시샘이 밀려왔다.
기독교인들은 오만과 착각을 버려야 한다. 기독교가 참된 진리라고 생각한다면, 그 참된 진리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알면서도 입으로만 진리 진리 떠든다. 신앙은 겉 모양이 아닌 능력에 있다. 능력은 아는 것이 아니라, 아는 대로 사는 것에서 나온다.
말씀과 물질의 풍요속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빈곤 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고, 가난과 척박함속에서 살아가지만 정작 부요한 것은 그들이다. 가난보다는 부유한 것이 낫고, 척박한 것보다는 풍요로운 것이 나은 것이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은 언제나 가난하고 척박한 환경에서 피어나는 것 같다.
그런데, 누릴 것을 다 누리는 나에게 가난은 부유함이고, 부유함이 가난함인지 모른다. 누릴 것을 다 누리고 살면서 이런 말 하는 것이 염치없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