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우리의 반면 교사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번 중국 애들의 깽판을 보면서 우리의 반면교사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중권씨의 속시원한 글도 좋지만 밖에서 보는 이방인 아닌 이방인 박노자씨의 시선이 이번엔 더 마음에 와 닿는다.


무소불위의 단어, “피해자”

지난 주말, 서울에서의 일부 중국 유학생들의 난동을 인터넷으로 지켜보면서 “역시 한국인들과 얼마 다르지 않구나”라는 생각이 들 뿐이었습니다. 여기에서 키워드가 되는 단어는 “피해자/피해의식”입니다. “삼성을 때리면 소니가 득을 본다”는 허위 선전으로 혹세무민하여 무노조 황제 경영에 대한 비판을 봉쇄시키려는 한국의 우파 신문들은 한국인들의 유서 깊은 대일 피해 의식을 교묘히 이용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미 적어도 수십만 명의 백성들을 아사하게끔 방기한 중대한 죄악이 있는 김정일 아저씨가 “미제 침략 책동의 위험”이라는 카드를 써먹을 수 없었다면 과연 그 백성들이 지금처럼 순순히 굶주림을 참고 있었겠습니까? 통계가 미비되는 관계로 이북 주민들 중에서 6-25때의 미제의 융단 폭격으로 죽은 이들이 더 많은지 아니면 1990년대중반의 대량 아사 사태로 죽은 이들이 더 많은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평양에서 살지 않고 간부층에 속하지 않는 대다수 북한 가정들의 아이들이 영양실조를 경험했다는 것으로 봐서는, 아무래도 미제보다 김정일을 위시한 평양 왕족, 귀족들의 죄과가 조금 더 무겁다는 생각마저도 강하게 듭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그러한 생각이 대개 불편합니다. 구한말 역사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을 봐도 일제 침략과 “일부의 반역자” (이완용 등)들을 가장 크게 탓을 하지, 군대를 2만 여 명으로 키워놓고서는 총탄 공장 하나 만들지 못해 결국 총탄 공급에 있어서 일본에 종속적으로 되어 대일 전쟁의 가능성을 원천봉쇄시킨 고종을 누가 탓합니까? “남”/”외세”나 “남에게 붙은 탈선 분자” (“매국노”, “역적”)에 모든 죄를 덮어씌우기가 아주 쉽지, “우리들의 큰 가부장”에 대해 비판적으로 사고하기가 훨씬 더 힘듭니다. 왜냐하면, 이 가부장에게 순종해온 “우리”들의 책임 문제까지 등장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과도한 집단적 피해 의식이란 책임 도피, 안락 추구 본능을 아주 잘 충족해줍니다. 학교 체벌부터 이명박의 대미 굴종까지 모든 문제들이 “청산되지 않고 남한을 계속 좌우해온 친일파들의 역사적인 유산”으로 인한 것이라면 “나”/”우리”는 완벽하게 면책됩니다. 나부터 내 집에서 내 아이에게 과연 동등하게 대해주고 있느냐는 불편한 질문들을 할 것도 없어지고요.


중국의 피해 의식이 과도하고 다소 피해망상증적이라 쉽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군비로는 (2004년 기준 약 650억 달러)  일본 (2007년 기준 410억 달러)을 위시한 영, 불, 독 등을 다 크게 앞지르고 미국에만 뒤지는 중국이라는 거인은 무슨 “약소국”입니까? 부국빈민 정책으로 소매 시장의 규모야 아직도 미국의 약 13분의 1 이지만, 구매력 기준으로 계산하면 총국민생산량은 이미 미국의 60-65% 이상입니다.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려고 한다는 것까지는 사실이지만 유럽인들의 중국관에는 지금 무엇보다 일종의 무력감이 가장 강합니다. 어차피 경제적으로 중국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다들 알고, 다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한 “축”으로서의 중국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프랑스나 영국 활동가들의 입장에서는 티베트 인권을 위한 시위들은 미제 반대 시위와 마찬가지로 “반제” 활동의 일부분이지 중국을 “무시”하거나 “음모”하려 하는 것은 전혀 아니지요. 그러면 경제로는 세계 12-13위, 군비로는 세계 9위라는 자랑스러운 위치에 서 있는 대한민국의 피해 의식은 과연 어떤가요? 일본의 일개 현 의회가 독도 관련으로 이상한 결의를 채택하자 대한민국의 대통령 (!)까지 나서서 담화를 발표하고, 이문열이 “독도에서 북한의 미사일 기지를 만들자”는 망언으로 정면대응한 것은 과연 정상적인 상황이었나요? 일본 사회 안에서도 그렇게까지 큰 호응을 얻지 못하는 일본 극우들의 망언에 최적의 대처법은 그냥 무시해버리거나 관련 관청에서 사실에 입각한 “훈화” 하나를 발표해주는 것인데, 대통령까지 나서다니 정말 저는 대한민국 시민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할 지경이었습니다. 대통령은 그렇다 치고 “국제주의”를 표방하는 급진주의 단체 “다함께”까지도 그 신문에서 “이 정부는 정말 독도를 수호할 의지라도 있느냐”는 식으로 “독도 애국심”에 편승할 지경이었지요. 원래 그 쪽 동네는 그나마 상식에 가까운 편이었는데, “독도”가 등장하기만 하면 역시 별 수 없는 것이지요. “충성스러운 한국 국민”으로서의 “정체”를 “선언”해야 정치 무대에서 살아남습니다. 뭐, 그게 요즘만의 일인가요? 아나키스트들이 정당 (민주통일당)을 만들고 총선에 참여하고 국회 의원을 만드는 나라는 대한민국 밖에 더 있었습니까? 안에서 보면 별 것도 아니지만 밖에서 보면 기이하기 짝이 없습니다.


우리 피해 의식의 한 가지 위험한 발로는 바로 그 놀라운 정복 야욕입니다. 물론 총을 들고 정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요. 2천만 달러를 주고 이소연 씨를 우주선에 탑승케 하여 우주 비행에 참석케 함으로써 상징적으로 “우주 정복”을 이루고, 황우석을 “국민 과학자”로 만듦으로써 “바이오 기술 정복”의 쾌거를 이루고, “디워”를 내세워 미국 영화 시장의 정복의 기초를 놓는 것, 여태까지의 우리 발자취 중의 일부입니다. 물론 황우석이 사기꾼으로 밝혀지고 “디위”가 미국 시장에서 아무 관심을 끌지 못한 채 퇴장하고 이소연이 우주에 잘 갔다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 우주과학이 갑자기 약진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정복”들은 잘 돼봐야 돈을 버리는 愚擧에 가깝지만 남는 것은 대중들의 열광입니다. 88올림픽의 열광, 월드컵의 열광, 황우석에 대한 신격화, “디워”의 광란 등등입니다. 그것이 집단 기억으로서 훈습되어 정부와 자본이 다음에 그 무슨 대형 행사를 만들면 당장의 자발적인 동원으로 그대로 살아납니다. 일종의 훈련이지요. 일부 한국 네티즌들은 중국 유학생 시위대보고 “나치스와 비슷하다”고 비난하지 않앗습니까? 맞습니다. 한국의 “애국적인” 우민들이 주로 댓글들을 무기로 삼는 데에 비하면 “저쪽”은 약간 수준 미달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몇 년전의 “황빠”들의 난동 동영상을 한번 다시 보기를 해보시지요. 이건 뭘 닮은 것입니까? 지금의 중국은 우리의 거울일 뿐입니다.

출처 : http://blog.hani.co.kr/gategateparagate/13150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