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 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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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대왕이 직접 그린 필국화도

요즘 드라마로 인기를 얻는 이산, 정조의 이름이다. 정조가 세종만큼은 아니어도 조선 왕조를 통틀어 세종 다음으로 위대한 왕이라는 것에는 별 이견이 없을 듯하다.

내가 정조에게 유달리 관심이 많은 것은, 정조가 다스리던 그 시기의 중요성 때문이다. 물론 정조 자신의 인간적인 매력 또한 무시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독살이라고 확신하는 경종의 뒤를 이어 영조가 임금이 되었지만, 노론 덕분에 왕위에 오른 영조가 노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이는 반노론 성향의 궁녀 밑에서 자란 사도 세자의 운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영조가 탕평책을 펼치고, 검소한 성군으로 교과서에서는 묘사되지만 반은 맞고 맞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영조가 검소하고 백성을 사랑한 군주인 것은 맞지만, 영조의 탕평책은 무늬만 탕평책일 뿐 노론 일색의 국정에 소론과 남인을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그나마 나주 벽서 사건으로 소론이 몰락한 것을 보면 영조는 태생부터가 노론의 임금이었다. 경종을 협박하다시피 해서 영조를 왕세제로 책봉한 노론의 공을 영조 또한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살아있는 임금을 협박해서 왕세제를 책봉한 사건은 이미 조선이 이때부터 망할 징조가 다분했다는 증거라는 생각이다. 정상적인 왕조에서 역적으로 몰릴 이 사건이 자연스럽게 전개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경종과 마찬가지로 정조 또한 사후 독살설이 끊임없이 유포되었다. 다산 정약용 같은 사람은 정조의 독살설을 확신한 사람 중의 한 명이다. 나름 일리가 있는 것이 무인의 풍모가 대단하였을 만큼 건강한 왕이 어느 날 갑자기 종기로 어이없이 세상을 떠나니 말이다. 개인적으로 정조는 오래 살 운명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오회연교에서 최후통첩을 보낸뒤 갑작스런 죽음은 의심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주변의 감시와 견제로부터 한시도 자유로울 수 없었고, 스스로도 잠 못이루고 미친 사람처럼 서성인 적이 많았다고 한다. 정조가 왕위에 직위하고 수차례 자객의 침입이 있었고, 침소까지 자객이 칼을 들고 침입한 사건을 보면, 왕이 되고서도 정조는 속이 썩어들어가는 왕이었다. 정조의 일기에는 즉위하고 병조판서의 얼굴을 보면서 속이 뒤집어 지는 심정을 적어두었다. “손으로 찢어죽이고 살점을 씹어먹어도 부족할 것이다.” 병권이 그의 손에 있으니 어찌 할 수 없었던 정조의 심정을 잘 나타내주는 문귀이다. 


다 적지 못하는 정조의 심정과 삶을 생각해본다면 그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혀 죽으면서부터 단명할 운명이었다. 그럼에도 정조가 꽤 오래산 것은 역대 다른 왕과는 달리 정조 자신이 뛰어난 무인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역대 어느 왕도 정조만큼 지략과 무예가 출중한 임금은 없었다. 이는 나중에 정조가 장용영으로 군권을 장악하는 든든한 기반이 되기도 한다.


정조 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성리학 일변도의 폐쇄적인 조선에서 그림에서는 단원, 사상에서는 실학자들이 대거 현실 정치에 참여 하였고, 사회, 경제적으로도 이전과 다른 기운들이 비로소 움트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정조가 꿈꾸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무엇을 위해서 강력한 지배 세력이었던 노론과 생과 사를 내건 혈투를 벌이며 그 꿈을 실현시켜 간 것일까? 수성 화성이 완공하고, 조선 최고의 정예 부대인 장용영을 바탕으로 그가 노론 세력에게 최후 통첩을 날린 까닭은 무엇일까?


24년을 절차부심하며 준비한 칼을 꺼내었을 때 정조는 어이없이 죽고만다. 당나라의 심장을 겨누었던 이정기처럼 말이다. 정조의 죽음은 승천하지 못한 용의 죽음처럼 많은 아쉬움을 남겨준다. 그가 다스리던 시기가 조선의 운명을 되돌릴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칸텔리 형은 문체반정을 예를 들어 정조의 보수성을 지적했는데, 역설적으로 나는 문체반정의 최전방에 서 있는 연암 박지원이, 정조에서 발탁되어 벼슬이라도 한자리 누린 것을 보면 정조의 문체반정은 평소 정조의 소신대로 왕권확립의 수단이지, 정조의 보수성을 나타내는 예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당시로서는 마르크스만큼이나 급진적인 사고로 위험인물로 취급받던 박제가를 등용하고 중요 관직에 임명한 임금이 정조였다. 정조 스스로도 박제가의 급진성에 우려를 표하기는 했지만, 정조는 보수성이라는 테두리로 한정짓기에 그 그릇이 넓은 임금이다.


조선 왕조 어느 시대에 서자가 정조 시대만큼 등용된 시기가 있었나 싶다. 규장각의 대표적인 지식인들에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서자들이 한 자리를 차지하고 오늘 날 그 이름을 후대까지 떨치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정조 안목을 높이 평가할만 하다고 생각한다. 노론 대신들은 도화원에서 잡일이나 하는 그림쟁이로 생각했던 단원 김홍도를 현감으로 임명한 것도 정조이다.


서자라고 천시 받던 박제가를 맨발로 뛰쳐나가 반갑게 맞이하고 손수 밥을 지어 대접한 사람이 연암 박지원이다. 거의 열살이나 아래인 박제가를 이렇게 깍듯이 대한 까닭은 연암이라는 사람의 그릇이 공자,맹자 때들며 백성의 삶은 안중에 없었던 노론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연암은 박제가라는 사람의 인물 됨을 알아봤고, 연암처럼 정조는 각 분야에서 꼭 필요한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봤다.


그래서 망해가는 조선이라는 나라가, 영,정조 시대에 반짝 빛날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광해군이라는 능력있는 임금을 몰아낸 인조반정때부터 망해가기 시작한 것이고, 그 흐름이 영,정조 시대에 잠깐 끊어지다 이어진 것이다. 정조가 죽고나서 세도 정치가 시작하고, 나라 도처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정조가 승하하기 전까지는 백성들은 정조라는 임금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그 희망이 사라지니 스스로 죽창과 낫을 들고 살길을 찾아 일어난 것이다.


칸텔리 형의 말처럼 정조 한 사람에 의해서 국운이 좌우되지 않을지는 모른다. 그런데 그렇게 생각하기에 정조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리어도 손색이 없는 조선 중흥의 전기였다. 백탑파라는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문인 집단이 나타났고 오늘날 우리가 자랑스럽게 배우는 실학자들이 대거 배출되었다. 회화에서도 이전과 다른 새로운 흐름이 나타났으며, 서학이 적극적으로 도입되었고, 새로운 종교인 천주교에 대해서도 비교적 관대하였다.


나라의 국운이 정조라는 성군의 능력을 힘입어 떠오르려 할 때 그 거대한 날개가 사라지니, 조선이라는 나라가 그렇게 허무하게 망한 것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자랑스럽게 배우는 실학자들의 최후가 어떤지 아는가? 정조가 죽고나서 모두 다 귀향가거나 얼마 안가 죽었다. 하다못해 단원과 같은 화가도 말년에는 아들의 월사금을 내지 못할 정도로 궁핍하게 살다 언제 죽었는지도 모르게 죽었다.


영조가 왕위를 세손 정조에게 물려주려 했을 때 노론 대신들은 결사반대하고 절대 왕명을 받을 수 없다고 항명했으며, 왕명을 받아 적는 승지를 가로막고 그 팔을 휘어잡으며 왕명을 전달하지 못하게 했다. 노론 대신들이 그만큼의 자신이 있었다면, 조선이라는 나라를 끝까지 책임졌어야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가 일제에 칼 한번 쥐어보지도 못하고 망했을 때, 노론중에서 단 한명의 독립운동가도 나오지 않았다.


이것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제 나라라고 여기며, 왕도 제1사대부에 불과하다고 외친 노론의 나라, 조선의 현실이었다. 노론들이 왜놈이라고 무시했던 섬나라 일본은 메이지 유신이후 동아시아를 무력으로 찬탈했고, 지금도 아시아를 호령하고 있다.


중세에 신학자들은 신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지들 머리속에서 놀았다. 기껏하는 논쟁이 바늘끝에서 천사는 얼마나 많이 앉을 수 있을까하는 논쟁이나 하고 살았다. 노론도 마찬가지이다. 주자학만이 참된 진리라고 섬기면서 지들 머리속에서만 놀고 살았다. 공자는 아는데 백성은 모르고 살았다. 그래서 조선이라는 나라가 망한 것이다. 일본은 늦었지만, 근대화를 지들 스스로 이룩하고 아시아의 맹주로 일어선 것이고. 조선이 일본보다 못한 것은 없지만, 일본은 조선이 열개라도 갖지 못한 정신을 갖았다. 그건 그 시대가 요구하는 시대 정신이다. 그것이 어찌 보면 미개한 나라 일본이 소중화사상까지 갖고 지 잘난 맛에 살던 조선과 다른 점이고, 그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이 나라의 운명을 갈랐다.


정조는 이 시대 정신을 이해하고 있었다. 능력있는 사람이 대접받고, 왕과 백성이 직접소통하는 나라를 꿈꾸었던 정조의 위대한 정신이 바로 그 시대가 요구하던 시대정신이었다.

오늘 날에 우리에게 필요한 시대 정신은 무엇일까? 씨꺼먼 먹구름이 잔득 몰려있는 이 시대의 정신은 무엇일까? 나는 정직이라고 생각한다. 정직하다는 것. 그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이다. 잘먹고 잘사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

 

 

 

이산 정조”에 대한 4개의 생각

  1. 정조가 주자의 경전 주석을 익히는 게 자신의 평생학문이라고 한 점, 노론의 영수 송시열과 김창집을 평생 존경하고 숭앙했으며 끝내 김창집의 후손인 김조순에게 세도를 맡긴 점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왕권을 강화하고 백성과 직접 소통하려고 한 것은 유교에 다 나와 있습니다. 말씀하시는 것처럼 유교를 넘어선 사상이 아니죠. 그리고 태조에서 고종까지 왕이란 왕은 다 그런 노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2. 일단 말씀하신 말들이 틀렸다고 부정은 못하겠습니다.
    맞는 말씀이시니까요.
    그런데 누구나 아는 그 사실을 실천한 사람은 세종이나 정조 대왕같은 분들 외 몇분 없었습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과의 차이는 그 차이가 아닌가 싶네요.

  3. 정조…끝내주게 멋있는 임금이셨군요.
    이미 지나간 역사라지만..정조대왕이 일찍 죽어서 아쉽습니다.
    그리고 그 생애도 인간적으로 너무 불쌍하네요…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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