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산, 정조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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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대왕의 친필

 
개혁군주 정조대왕이 갑작스래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후 조선은 국운이 다한 듯, 쇠퇴해가다가 칼 한번 뽑아보지 못하고 외세에 나라를 내주고 만다. 정조가 과연 의문의 죽음을 당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역사를 달라졌을까? 나는 그렇다라고 생각한다.

  지난 역사스페셜에서는 정조의 독살설을 다루었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서에서 정조의 죽음에 대해서 독살설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만큼 정조의 독살설은 당대에도 사라지지 않는 의문 그 자체였다.


  한창 나이에 그것도 종기때문에 어이없이 사망한 총명한 임금을 두고 아쉬움에서만 독살설이 나온 것은 아니다. 정조의 독살설은 충문한 가능성과 정황증거를 갖고있기에 오늘 날에도 그 논란이 분분한 것이다.


  정조는 죽기 전에도 스스로 처방을 내려 병을 다스리려 하였다. 그만큼 내의원에 대한 불신, 나아가 노론 강경파에 대한 뿌리깊은 불신을 갖고 있었다. 연훈방에 의한 독살로 다산은 생각하였지만 오늘 날의 학자들은 연훈방에 의한 수은중독의 가능성보다도 종기의 의도적인 악화로 인한 사망에 무게를 두고 있다. 정조를 진료하였던 어의는 그의 저서에서 종기의 가장 좋지않은 증세의 첫번째로 입맛을 들었다. 하지만 정조의 입맛을 잃어간다는 호소에도 그는 정조의 병세가 호전되고 있다고 거짓을 고하였고 정조가 거부하던 경옥고라는 보약을 계속 처방하였다. 정조 스스로가 자신은 경옥고가 몸에 맞지 않다면 의식이 있을 때마다 말했지만 무용지물이었다. 한의학에서 종기에 경옥고라는 보약은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언급하고 있고 정조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탕제가 처방되고 증세를 악화시킬 수 있는 약제들이 지속적으로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정조의 독살설은 그 나름의 신빙성을 갖추고 있다.


  사실 이것 외에도 정조는 즉위 초 조선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자객 습격사건을 겪는다. 평소 암살이나 자객의 침입을 우려 책을 읽으면 날을 지세우는 날이 많았던 정조의 습관이 아니였다면 정조는 자객의 손에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도 자객의 침범을 정조 스스로가 알아채고 대비하였으니 말이다. 궁녀 내시 호위무관이 연계된 이 암살사건을 바라볼 때 정조는 즉위초부터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늘 자유롭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조 앞에서 웃음을 띠고 충성을 다짐하는 상당수가 속으로 칼을 품고있는 적들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암살사건의 배후에는 정조의 할머니 즉 영조의 부인이 개입되었다는 정황적 증거가 있었다.


  세종대왕이 비견될 만큼 뛰어난 업적을 남긴 정조였지만 그는 아버지를 잘못만났다. 세종은 태종을 아버지로 두어 후일 근심거리나 그의 통치를 방해할 모든 것을 아버지가 스스로 손에 피를 묻혀가며 처리해주었지만 사도세자를 아버지로 둔 정조는 목숨까지 위협당하는 짐만 물려받았다. 사도세자도 뛰어난 인물이었지만 노회한 붕당 정치인들을 당해낼 수 없었고, 그 와중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해 영조와 정조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을 남겨두었다.


  어려서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 목격한 정조를 집권층 노론이 가만 둘리가 없었고, 끊임없이 폐세자를 주청하고 세자를 위협하였다. 영조의 비호아래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지만 정조가 즉위하고나서도 정조는 힘이없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치장하는 것 외에 정조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와 매일 대면하면서도 속끊는 분노를 참을 수 밖에 없었던 정조의 마음이 후일 그의 병을 불렀는지도 모른다. 의원들은 정조의 종기가 홧병으로 인한 것이라고 진단을 내렸으니 말이다. 정조는 직접 특정 인물을 지칭하며 그가 병권을 쥐고 있고 그를 따르는 세력이 많아 속이 뒤집히는 분노에도 참을 수 밖에 없었다며 말하였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정조의 큰 꿈이 제대로 이루어지기까지는 참으로 수많은 시간이 필요로 하였다.


  어떤 사학자는 정조의 개혁이 지나치게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점을 비판하였다. 나 역시도 그 점에 상당부분 동의하는 편이었지만 이번 역사스페셜을 보고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자객까지 왕의 침소에 침입하는 상황, 이름뿐인 왕좌위에서 정조의 고민은 깊고 깊어졌을 것이고, 그것은 정조에게 깊은 몸과 마음에 병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도 결국 개혁의 대업을 완성한 정조는 세종에 비견될 만큼 위대한 성군이었다. 그가 이룩한 대업이 그 열매를 맺지못하고 한여름밤의 꿈처럼 사라져버린 것이 안타깝지만 조선이라는 나라의 운이 거기까지인 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수원성과 장용영이라는 열매를 바탕으로 타락한 노론 강경파를 숙청할 수 있는 일대의 호기를 잡은 재위 24년, 그러나 나라의 운은 거기까지였다. 물론 이것이 정조 개혁의 한계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왕이 다스리는 나라에서 무엇을 얼마나 더 바랄 수 있겠는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정조의 개혁이 열매를 맺을 순간 정조는 허무하게 종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조선은 긴 세도정치가 시작되고, 정약용과 같은 유능한 실학자들은 모두 쫓겨난다. 그리고 조선은 긴 긴 망국의 길을 걷는다.

  정조를 바라볼 때마다 노무현이 생각나고는 한다. 노무현이 정조만큼 똑똑하고 뛰어나지 못한 것은 이제 자명해졌지만, 또한 자명해진 것은 이 나라의 노론벽파와 같은 수구세력은 지금도 조선시대와 마찬가지도 똑같다는 것이다. 개혁에 제동을 걸고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익에만 무장한 그들을 바라볼 때면 왕을 죽이려도 들던 노론벽파들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정조는 재위기간중에 7차레나 자객의 위협을 받았다. 오늘날의 노론벽파들은 자객이 아닌 국민들의 눈과 귀를 흐리고, 자신들의 모습을 철저하게 애국,애민으로 미화시켜 대통령을 죽이려든다. 대통령을 실없는 인간으로 만들고 자신들을 고뇌하는 지성인으로 만들어놓았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다만 변하는 것은 세월이라는 격언을 말해주듯이 그들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고, 세월만 흘러간 것일 뿐이다. 그래서 내가 정조 독살설을 보고 생각이 많았는지도 모른다.

  정조의 재위기간이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운이 욱일승천하는 천재일우의 호기였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어디쯤 위치하고 있을까?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제 모두가 어울려 잘사는 나라가 되느냐, 아니면 가진 사람들만 누리면 사는 나라가 되느냐 이 기로에 서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이 바로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시기이고, 우리가 이제 어떻게 살아야되는지 그 기로에 서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나는 지금 여기서 개혁이 중단되고 노론벽파와 같은 수구들에게 우리들의 권력이 넘어간다면 다시 한번 200년의 세도정치가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수구세력들은 자신들을 철저하게 위장하고 자신들만의 이익만을 철저하게 찾아헤메는 하이에나와 같은 무리들이다. 국익을 논하고 나라의 장래를 논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 보험용 면죄부와 같은 것이다. 그들은 법의 심판앞에서 늘 이 보험카드를 커내놓으니 말이다.

  정조가 죽은지 200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갔지만 아직도 이 나라는 정의와 평등이라는 말에 무관심하고, 나만을 위한 생각이 판을 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대한민국이라는 이 나라를 뿌리부터 좀 먹고 있다. 판사님들은 가진 사람들에게 관대하시고, 나랏님들은 서민들 뿐돈을 횟집(바다이야기…)을 통해 쓸어가시고, 좀 있는 아줌마들은 아파트값 열심히 담합하시고… 이 나라는 너를 생각하지 않고 나만 생각하는 병에 물들었다. 너가 죽던 살던 나만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세월은 변해도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이산, 정조의 꿈”에 대한 7개의 생각

  1. 핑백: Nude & Nude ~
  2. 그래도 역사는 계속됩니다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면서 아주 조금씩이나마

    우리때에 이루지못한 가치가
    언젠가는 실현될겁니다

    아직 봄이 왔다고 말하기엔
    바깥의 바람이 찹니다

  3. 옳으신 말씀이 마음에 와 닿네요.
    아직 밤공기 차고, 새벽은 멀었지만,
    밤이 깊을수록, 아침이 가깝다는 말을 위로 삼아,
    더욱 날의 새워야 하겠습니다.

    제 블로그 방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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