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태어나 세 살 때 네 아비가 죽었고, 여섯 살에는 네 어미가 죽었다. 너의 안주인이 거두어 길렀으나, 주리고 춥고 병들어 오래 살지 못할까 염려하였었다. 네 안주인의 상을 당했을 때 너는 고작 5척 어린애였다. 머리털은 헝크러져 괴이하였고 다만 비쩍 마른 원숭이처럼 파리하였다. 내가 또 재앙을 만나 부자가 흩어져 있을 때, 너는 동해 바닷가까지 만 리 길을 울부짖었고(아들이 간성 땅에 귀향가 있었다), 또한 서쪽 변방 밖(아비는 위원 땅에 귀양가 있었다)까지 눈과 서리, 더위와 비를 맞으며 밭바닥이 갈라지고 이마가 벗겨지도록 왕해하면서도 후회하는 빛이 없었다. 또 가난한 집에 종살이하면서 두 눈이 늘 피곤하여, 일찍이 단 하루도 일찍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 등 긁고 머리를 흔들면서 맑게 노래하며 환하게 즐거워해본 적이 없었기에 내가 이를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그 배를 가른다면 반드시 붉은 것이 있어 마치 불처럼 땅 위로 솟구쳐 오를 것이니, 평생 주인을 향한 마음이 담긴 피인 줄을 알 것이다. 네가 이제 땅속에 들어가면 네 아비와 어미, 네 형과 너의 안주인과 작은 주인이 마땅히 네가 온 것을 보고 놀라 다투어 내가 어찌 지내는지를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근년 이래로 온몸이 좋지 않아 이빨과 터럭은 시어져서 몸비 늙은이가 다 되었따고 말하여다오. 그러면 장차 서로 돌아보며 탄식하고 낯빛이 변하면서 나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아아!
아무 해 아무 달 아무 날에 주인은 글로써 죽은 종 막돌이의 장례에 고하노라, 아아! 너의 성은 채씨이고, 네 아비는 관동의 양인이었다. 너의 어미는 내 외가의 여종이었다. 네 아비가 내 말고삐를 잡은 지 20년만에 마침내 길에서 죽어 내가 남원 만복사에 이를 장사 지냈다. 네 어미가 내 몸을 봉양한 것이 30년인데 마침내 집에서 죽으니, 내가 공수곡의 서산 아래에다 장사지냈다. 네 형이 나를 수십 년 동안 부지런히 섬기다가 또 집에서 죽으니, 내가 또 이를 장사 지냈다. 이제 네가 또 자식 없이 죽으니, 너희 채씨는 마침내 씨가 없게 되었구나.
이 제문을 지은 노긍은 영조 시대 사람이고 당시 권세가 홍봉한의 집에 수십년을 문객으로 얹혀 살았던 인물이다. 정조가 즉위하고 과거 답안지를 대필했다는 죄목으로 멀리 평안도 위원까지 귀양을 가게 된다.
권세가의 문간방에서 수십 년을 식객으로 지낼 정도니 얼마나 가난했을지 짐작하고 남는다. 가난했지만, 능력은 특출나서 과거만 보면 합격을 밥 먹듯이 했던 인물이다. 당파싸움의 틈바구니에서 자신의 특출난 능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던 까닭에 세상을 조롱하였고, 과거 시험장에서 답안지도 작성 못 해 쩔쩔매는 사람에게 덥석 자기 답안지를 건네주던 시대를 잘못 만난 천재이기도 했다.
노긍이 지은 이 제문을 읽고서 내 마음속 깊이 다가온 것은 주인공 노긍 자체가 아니라 이 제문의 주인공인 성도 없는 머슴 막돌이다.
가난한 양반집 노비로 얼마나 그 삶이 힘들고 어려웠을까……. 아버지는 주인 말 고삐를 잡다 객사하고 어려서부터 고아로 천덕꾸러기로 자랐을 텐데, 고생이 삶이요, 삶의 즐거움은 남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천성이 착한 탓인지 가난한 주인 양반에게 온 힘을 다해 섬기다 고생 끝에 생을 마치니 주인은 그 심성이 고맙고 그간의 노고에 눈물이 나는지 이런 애절한 제문을 지었다.
노긍은 그래도 이름을 기억해주는 후손이라도 나왔지만, 막돌이…. 그 시대를 살았던 수많은 막돌이는 자신은 잊고 양반이라는 지배층을 위해서 피땀을 흘리다 생을 마쳤다. 오늘 누구도 그 많은 막돌이를 기억해주지 않는다. 양반 지배층의 그 고매한 문화는 이 수많은 막돌이의 눈물과 땀이 토양이 되어 그 꽃을 피웠지만, 후세의 찬사는 양반에게만 돌아간다.
이 시대에 막돌이는 우리네 보통 사람일 것이다. 내세울 학벌도 변변찮고, 학식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돈을 쌓아둔 것도 아니요, 든든한 배경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대 막돌이에 비하면 얼마나 자유롭고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가.
물론 지금 우리는 먹을 것 걱정하는 사람보다 무엇을 살까 고민하는 사람이 더 많은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자. 아니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신문 한 장만이라도 펴 보자. 대통령이라는 인간이 나서서 이 시대 막돌이를 어떻게 죽이려고 드는지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놈의 세상은 변한 것이 없다. 그래서 한숨이 나온다. 과거처럼 주인 말고삐나 잡다가 이름도 모르는 곳에서 객사하기 싫다면 손에 돌이라도 들어야 한다. 세상이 다시 과거로 돌아가려 한다. 정신 놓지 말자. 이 빌어먹을 세상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