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켓 쏘는 나라, 침 쏘는 나라



문화일보, 2004년 2월20일자 7면 시론

<지난 1980년대, 일본경제가 욱일승천의 기세를 보였을 때다. 이대로 가면 세계 최강의 미국 경제를 앞지르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미국 학자 에즈라 보겔이 쓴 ‘재팬 애즈 넘버원’이라는 책은 이런 추세를 단 한마디로 상징해주는 베스트셀러였다. 미국인들은 건국이래 처음으로 좌절의 기분을 맛봐야했으며 매스컴에서는 스스로를 풍자하는 자조적 유머가 떠돌았다. “미국인들이 포테이토 칩을 만드는 동안 일본인들은 반도체 칩을 만들고 있다.”


지금 이와 유사한 풍자가 한국사회에 등장했다. 지난주말 변호사협회의 박태범 부회장이 우리 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이공계 기피 현상과 관련해 내뱉은 농담이다. “중국의 수재들이 우주선 로켓을 쏘아올릴 때 우리 수재들은 (한방치료를 위한) 침을 쏘고 있다”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일까. 항간에서는 요즘 세대가 수학을 기피하기 때문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기도 하지만 같은 이과계인 의과대학에 수재들이 몰리는 현상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는 않은 것같다. 오히려 “여자들이 벌레 앞에서 징그럽다고 소리를 지르면서도, 누에를 거리낌없이 만지는 것은 그것이 돈이 되는줄 알기 때문”이라는 한비자(韓非子)의 설명이 훨씬 설득력 있다.


그렇다. 의사라는 자격은 일단 따놓기만하면 우리나라에서 몇 안가는 고소득 보장 직업이다. 오륙도나 사오정도 없고 삼팔선도 없다. 이보다 더 좋은 직업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너도나도 박터지면서 의대로 진학하려든다. 대충 이해가 간다. 하지만 수수께끼는 여기서부터다.


시장경제에서는 수요와 공급이 일치하는데서 균형이 이뤄진다고 배워왔다. 그렇다면 의사가 되고자하는 지원자 즉 ‘수요’가 많으니 이들을 의사로 만들어주는 기관 즉 ‘공급’이 늘어나는게 당연하다. 이렇게해서 의사라는 직업도 결국 기회비용에 걸맞은 소득수준에 근접하게되고 인문대나 공대, 아니면 다른 직업과의 인적자원 공급 균형이 이뤄지는게 당연할 것이다.


그런데 의사라는 직업은 그렇질않다. 우리 사회에서 변호사, 회계사 등 모든 전문직의 숫자가 급격히 늘고 있는데도 의사만은 예외다. 더욱 불가사의한 것은 그 숫자가 오히려 줄고 있다는 점이다. 어찌된 영문인지 수요·공급원리가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의과대학 입학 정원은 지난 2000년의 의약분업 파동때까지만해도 총 3500명에 달했다. 그런데 의약분업 파동 이후 슬그머니 의과대학 정원의 10% 즉 350명이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왜냐고? 글쎄, 알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묵묵부답이다.


그래서 보건복지부에 물어 보았다. 다른 직업은 전부 자격시험 합격자수를 늘려가는데 유독 의사 숫자만 줄이는 이유가 뭔가 하고. 그 대답이 꽤나 의외였다. 의료계는 수요·공급과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의사수가 늘어나면 의료비도 늘어나는 (괴상한) 법칙이 작동하기 때문에 숫자를 줄여야 국가 의료비부담을 줄이는 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고 했더니 이게 원래 전문적이고 복잡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니 그런줄 알라는 식이다. 게다가 자신은 얼마전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온 사람이라고 묻지도 않은 대답까지 해준다. 아하 박사 아니면 알기 어렵다는 뜻인가보다. 그래도 세금낸 죄밖에 없는 시민의 질문에 대해 성실히 답변해주는게 세금으로 공부한 공무원의 도덕적 책무 아닌가?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교수에게 똑같이 물었더니 이렇게 답변해준다. “의사를 늘리면 오히려 의료비가 늘어난다고요? 전형적인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입니다. 공급을 늘려서 경쟁이 치열해지면 그런 식의 모럴 해저드는 자연히 걸러지게 마련입니다.”


겨우 그제서야 보건복지부의 논리가 왜 세상 돌아가는 이치와 다른지 의문이 풀렸다. 더불어 우리 사회 이공계 기피현상의 뒤에는 뭔가 보이지않는 왜곡구조가 자리잡고 있는 것 아니냐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참, 공대졸업생은 공급과잉이란다.



자주 찾아가는
百花齊放 님 블로그에서 이 글을 읽었다.
사람은 하나를 가지면 두개를 갖고 싶어 한다. 누구도 예외가 아니다.
지혜롭고 싶으면 그 하나를 버릴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하나를 갖고 싶어 발버둥 치는 사람의 모습보다
하나를 더 갖고 싶어 발버둥 치는 사람의 모습이 추한 까닭은,
그때부터 인간은 탐욕의 노예가 되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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