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교회를 다니면서 큰 꿈을 품고 큰 사람이 되겠다는 생각은 일종의 망상과 같다. 큰 교회를 다니면서 세상을 복음화 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겠다는 분들이 계시는데, 일단 입에 침부터 닦고 어서 착각에서 벗어나시기를 조언하고 싶다.
큰 교회의 신자들의 개개인의 신앙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마다 다르 듯 큰 교회도 진정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신실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큰 교회가 주는 혜택이 좋아서 아니면 부담없이 나갈 수 있는 그 편안함이 좋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큰 교회라는 하나의 집합으로 묶여졌지만 그들의 가지고 있는 개개인의 속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기 떄문에 큰 교회 다닌다는 사실만으로 개개인의 신앙을 짐작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하지만 교회가 단순히 개개인이 모인 집합의 합에 불과하다면 교회를 공동체라 부를 수 없다. 그것은 공동체가 아니라 바닷가에 쌓인 모래 알갱이처럼 자연스럽게 형성된 백사장에 불과하다. 교회는 공동체라는 이름의 전체와 부분의 조화를 뜻한다. 초대 교회가 그러했던 것 처럼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한다는 것은 너와 나가 운명 공동체처럼 서로가 사랑이라는 긴밀한 끈으로 연결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공동체 안에서 형제, 자매로 불렀던 것이고 서로를 운명 공동체처럼 생각하였다. 교회안에서 신분의 높고 낮음은 없었고, 가난하고 병든 지체들의 현실은 나의 현실이었던 것이다.
로마의 그 악명높은 박해속에서도 신앙 공동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까닭은 바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피보다 진한 가족이라는 신앙 때문이었다. 내가 죽을지언정 형제를 팔아넘길 수 없었고, 내가 굶주린 사자굴에 떨어지더라고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교회의 본질은 완전히 변하게 된다. 그것은 적정 규모를 유지하며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교회가 대형화, 공식화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이다. 이제는 이 거대한 규모가 만들어내는 권력과 풍요로움의 혜택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너도 나도 없이 기독교 세례를 받고 입교 하였고, 교회는 점점 커지고 권력의 상징으로 변모하였다. 기독교는 날로 번창하였고, 동시에 기독교는 날로 죽어갔다. 그것이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하고 만들어가는 교회의 모습이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이 아프리카를 침략하기 이전에도 아프리카에는 말라리아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서구의 침략이 있기전까지는 말라리아로 인해 아프리카가 오늘 날과 같은 대환란을 경험하지 않았다. 오늘 날 아프리카를 위협하는 가장 큰 위협 요인은 에이즈가 아니라 바로 말라리아이다. 아프리카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거듭하는 가장 주요한 원인 또한 말라리아이다. 그것은 서구의 침략으로 인해 전통이 파괴 되어버린 아프리카의 슬픈 현실이기도 하다. 서구의 침략 이전 아프리카의 각 민족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 고립되어 살았으며 집단의 적정 인구수를 유지함으로서 말라리아의 대규모 발병으로부터 안전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자연스럽게 말라리아에 대한 내성로 키워낼 수 있었고, 자연의 위협속에서도 자연과 공존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서구의 침략 이후 서구화된 아프리카 사회는 인구의 밀집과 급격한 도시화를 이루게 된다. 이는 말라리아 창궐의 좋은 환경을 제공하였고, 수천년에 걸쳐 이룩한 그들의 유전적인 내성은 항생제와 다른 치료제에 내성을 키운 말라리아 균 앞에서 하루아침에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교회도 이와 비슷하다. 권력과 풍요라는 사탕앞에서 교회는 이제껏 누리지 못한 그 안락을 얻었다. 생존의 기로에 섰던 이전과 비교할 수가 없었다. 이제 교회에는 권력자들이 모여들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금 누리는 이 안락함을 놓기 싫어 교회는 더욱 권력을 추구하고 대형화를 추구하게 된다. 이전의 적정 규모를 유지하면서 서로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던 초대 교회의 전통은 사라졌다. 교회는 성장하는데 교회가 죽어가는 역설적인 역사가 펼쳐지게 된다.
집단의 힘은 그 집단의 규모에서 나온다. 그리고 규모가 커질 수록 필연적으로 그 부정정 속성 또한 커지게 된다. 천적이 사라진 초원에서 영양은 기하급수적인 개체 증가를 이루지만 결국에 규모를 감당하지 못하고 그 규모가 품어내는 부정적 요인들로 인해 자연발생적으로 개체수가 감소하게 된다. 그런데 사람은 생태계의 일원이면서도 생태계를 지배하고 파괴하는 독특한 존재다. 그래서 사람이 이룩한 규모는 부작용이 커질수록, 어떤 식으로든지 그 부작용을 완충하며 규모의 성장을 지속시킨다. 그러면서 동시에 발전을 이룬다. 우리가 이룩한 사회가 바로 이렇다. 인류의 지식과 인권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 그 어느 시기보다 부의 격차가 벌어진 시대를 살고 있으며,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 계급 격차가 벌어진 시대를 살고 있다. 몸집은 커졌지만, 그 안의 모순은 더욱 증가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현한다는 교회가 바로 이 모순 가득한 사회와 똑같다는데 문제가 있다. 입으로 거룩한 말을 떠들고 선행을 베풀어도 이미 규모화된 이 체제속에서 개개인의 선함은 개개인의 차원에 머물뿐, 그 총합이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이미 권력집중과 남용이 팽배하기 때문이다. 큰 교회의 수많은 성도들이 온갖 선행으로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여도, 중앙에 집중된 권력이 남용되거나 잘못 사용될 때 교회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시장처럼, 제로섬의 게임에 놓이게 된다. 제로섬의 게임에서 윈-윈 게임은 없다.
기본적으로 인류의 문명이 시작한 것도 지리라는 환경의 지배를 받았다. 오늘 날 선진국이라고 불리는 나라들이 죄다 같은 위도상에 위치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인간이 환경의 영향만을 받는 존재가 아니지만 결과론적으로 인간의 환경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종속적 존재이다. 다만 가끔 주체적일 뿐이다.
사람에게 권력이라는 것이 주어지면 필연적으로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다. 그 변화가 긍정적이면 좋겠지만, 권력의 속성상 사람은 그 권력의 속성을 따라가게 되어있다. 몇몇 예외가 있을 뿐, 절대 다수의 사람은 권력의 어두운 속성을 닮아간다. 심심할 때마다 터지만 대형교회 목사님의 비리와 교회 내부의 문제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사람을 자부하는 기독교인도 인간 본연의 속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대형교회가 만들어내는 독소는 교회 자체의 힘이 아니다. 그것은 선량한 다수의 신앙인들이 모여 이룩한 거대한 힘이다. 선량한 개개인의 신앙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독소를 뿜어내는 이 역설적인 현실. 이것이 바로 규모를 추구한 오늘 날 한국 대형 교회의 모습이고, 역사를 통해서 검증된 기독교 교회의 모습이다.
역사를 통해서 교회의 대형화가 어떤 독소를 뿜어내는지 우리는 잘 배웠다. 그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는 대형화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잊어버리는 것은 달콤하고 그 헤택은 황홀하기 때문이다. 어떤 교인은 무지해서 어떤 교인은 알면서도 대형교회를 다닌다. 무지는 쇠망의 지름길이고, 위선은 타락의 지름길이다. 오늘 날 한국 개신교에서 자정능력이 상실되어 가는 가장 큰 이유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대형교회를 다니면서 한국 교회를 정화하고 쓴 소리를 못할 이유는 없다. 또한 대형교회를 다닌다고 죄책감을 가질 것도 없다. 대형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가 바른 생각과 주장을 가로막을 그 어떤한 근거도 없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 하실 때 초라한 어린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다. 예수님이 휘황 찬란한 백마들이 이끄는 황금 마차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면 그의 사역이 더욱 빛을 발휘했을까?
생각과 판단은 자유지만, 기독교인이라면 예수를 사랑한다고 고백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을 본 받아야 하지 않을까? 적어도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고민은 해야 되지 않을까?
정말 한국교회의 대형화, 세속화 내지는 그로부터 영향받은 일부 신도들의 맹목적이고 배타적인 종교관에 가끔 소름끼칠 때가 있습니다. 걱정됩니다.
쓴소리보단…. 관심과 염려로.. 기도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살아보니… 말을 많이 한다고 사람이 변하는 것이 아니고..
정성을 들어… 간구하고.. 다정하게 대하고..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말을 하면.. 변화가 이루워지는 것 같아요.
전.. 그렇게 살고 싶어요.^^*
미국의 신교도들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그런지 몰라도, 대한민국 개신교는 심하게 어긋나 있습니다.
사실 그 반사 작용으로 가톨릭이 그렇게 대대적인 성장을 이루어냈는지도 모르지요.
물잔디님의 말씀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이런 논리는 대형교회 목사들이 주야장천(晝夜長川) 지껄이는 소리입니다.
그럼 예수님도 골방에서 기도하시지 왜 바리새인에게 그토록 혹독한 비판의 칼날을 세우셨을까요?
기도한다는 말은 행동한다는 말과 동의어 입니다. 교회의 현실에 대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교회의 불의에 대해서 참지 않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앙과 삶에 대한 일원적인 생각이 필요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대형교회가 옳으냐 그르냐 하는 원론적인 접근을 해보기 전에, 일단 한국 대형교회의 경우만 따져본다면 그런 원론적인 접근은 잘 모르겠다 하더라도 결론적으로 나타나는 모습으로는 일관성 있는 대형교회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reverse engineering이라고도 하는, 완성품을 분해하면서 기술을 습득하는 것처럼…. 한국대형교회라는 완성품은 분해해보면서 본질을 파악해 보기 쉽도록 일관성이 뚜렷한 것 같습니다. 마음에 두었던 교회의 출석을 미루고 원래 다니던 교회보다는 낫겠지 하며 다녔던 집 근처 대형교회도 몇 주 다녀보니 그 나물에 그밥 이었음을 아내와 처절(?)하게 동감했습니다.
대형교회 몇 년 다녀 봤는데… 흠~ 깊이 관여하지는 않아 뭐라 드릴 말이….. -_-;; 대형교회의 장점은 뭐, 다양한 인프라와 함께 ‘편리함’ 이겠죠. 제가 개척교회부터 청년부만 2000 ~ 3000명 넘는 교회까지 30년을 두루 섭렵(!)해봤더니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교회는 그 세대에 맞는 촛점, 어느 정도 입맛을 맞춰는 줍디다. 나이드신 분들만 계시는 데 있어봐요, 솔직히 무지 깝깝(!)합니다. 특히 보수 성향이 짙기 때문에 목사님 설교 듣다가 몇 번을 벌~떡, 일어나고 싶은 충동이…
ㅎㅎ~ 교회가 작으면 목사 – 성도 간, 또한 개인 간 <알찬 교제>가 있기는 하나 교회 일이 치여 죽어나게 됩니다. ㅠ_ㅠ;; 더군다나 나라는 사람이 겪고 있는 개인, 사회, 계층, 기타등등과도 연관된 신앙의 고뇌를 공감하며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지요. 의외로 이런 문제에는 목사님이 별 도움이 안됩디다. -_-;; 나중에 지쳐서 나가 떨어지기도 한다눈…
둘의 공통점요? 결국 우물 안 개구리처럼 예배당 안 만 맴돌게 되는 겁니다. 오히려 비신도 내지는 개독(!!)혐오론자를 만나야 제대로 알게 되는 면이 있어요. 제가 알게 된 개신교의 부정부패의 역사는 대부분 비신도가 알려준 겁니다. 처음에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낯뜨거워서 고개를 못 들었지만 지금은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라는 대답을 하는 이들에게 저는 오히려 답을 보고 있어요.
…적어도 개신교인들이 고난을 당할지언정 비난을 받아서는 안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어디가서 최소 욕은 안 먹게 처신을 해야 하는데 대놓고 개신교인임을 자처하면서 욕 들어먹는 인사들 땜에 진짜 깝깝합니다. 하나님 얼굴에 웬 먹칠이란 말인고? 문제는 대형교회들이 앞장 서서 뻘짓거리 한다는 거….. 물론 과거에도 관행으로, 혹은 정말 뻔뻔하게 있어왔지만 최근에는 최악의 방법들로 부각되면서 사회적인 문제거리로 입도마에 오른 것은 회개해 마땅합니다. 수구꼴통과 손잡고 밑닦개로 전락한 <사두개 - 바리새인 제사장>들만도 못합니다.
…특히, 소자로 하여금 시험에 빠지게 만드는 몇몇 대형 교회 목사들… 연자맷돌 목에 묶어 제물포 앞바다에 던져버리고 싶은 심정입니다. 허허~~~~~~ -____________-+ ㄷㄷㄷ…….. 지금 예배당 안 다니고 집에서 성서 보고 삽니다. 집 주위에 있는 순볶음(!) 계열은 조 골리앗(!!!) 목사 땜시 도저히 못 가겠더라구요. 성당은 넘 멀고……
저도 대형교회를 다닌 적이 있어요. 목사님을 목사라고 맘대로 부르는 장로들, 서로 사분오열되어 싸우는 교회 세력들. 이 꼬라지가 보기 싫어서 작은 교회로 옮겼습니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편하니 이게 낫지요.
도대체 대형교회의 존재 이유를 이해할 수도 없을 뿐더러, 사교를 목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인지, 영업을 목적으로 교회를 다니는 것인지. 저도 헷갈릴 때가 많습니다.
교회의 부정부패가 어제 오늘이 아닌데, 유독 오늘 날 더욱 심하게 느껴지는 것은 장로가 대통령이 되어서 교회 세력과 정치 세력의 일치되었기 때문이겠죠.
제정일치가 얼마나 큰 비극을 낳는지 조만간 가시적인 성과가 나오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