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를 잃어버린 21세기

[한국에 살아보니]‘지혜’를 잃어버린 21세기
입력: 2008년 10월 17일 17:57:26
 
처음 경주의 고도(古都)를 구경하러 갔을 때 신라의 부드러운 금빛과 아늑한 조경에 사로잡혔다. 우아하게 동그란 왕릉들과 여기저기 여유있게 배치된 건축물들의 조화는 그 평화로움을 더 했다. 특히 안압지는 당시 사람들의 전통적 조경문화, 즉 자연관 또는 철학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을 즐기기 위해 일부러 판 연못이지만, 될 수 있는 대로 ‘자연스럽게’ 해놓으려고 한 노력이 보인다. 자연을 가까이 하고 체험하기 위해 바다 같은 궁 곁에 달린 이 연못은 궁과 황야를 느슨하게 매개하는, 모호한 투과성이 있는 경계지다. 예컨대 정약용의 유배지였던 다산초당에서도 보이듯, 자연을 완전히 통제하려 하지 않고 자연을 자연대로 놔두면서도 같이 놀고 싶을 때 불러들인다는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자연과 인공의 조화로운 조경이다.


몇 년 전 교토에 방문할 때 광경은 사뭇 달랐다. 조용하고 오랜 전통에 젖은, 아기자기한 그 도시에도 은근히 반했지만, 전통 정원들이 너무 인위적으로 느껴졌다. 보기가 좋다고 할지라도 마치 못바늘에 꽂힌 나비처럼 미라 같은 숨 막힌 묘한 인상이었다. 특히, 료안지(龍安寺) 안에 자리 잡은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은 마치 자연이 응결된 것처럼 느껴져 충격적이기도 했다. 일본정원의 특징은 자연을 집안으로 그대로 들여놓는 것이고, 그래서 작게 만들기 위해 강산초목을 가꾸고 가지치기하는 전지(剪枝)문화다. 서양에서 박제가 부나 힘을 과시하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일본 전지문화는 자연을 사람의 손아귀에 넣어 갖고 노는 것 같다.


가지기 위해 깎고 거두어야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이 문화는 일제 강점기에 한국에도 들어왔다. 현충원, 국회, 청와대, 독립기념관, 교정 등 다양한 정원에서 이런 분재(盆栽)조경을 오늘날까지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청계천과 대운하 계획으로 상징되기도 한 최근 형국도 이런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청계천은 보기 좋을지 몰라도 천으로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좌우의 높은 댐과 건물 때문에 냉기가 뜨거운 도심 속으로 거의 퍼지지 못하고, 유수(流水)도 정화(淨化)도 인위적으로 해주어야 비로소 천이 흘러 진짜처럼 보일 수 있을 뿐이다. 우연인지 시국도 왠지 비슷한 논리에 따라 분재조경을 닮아간다는 생각을 떨치기가 어렵다. 임기가 남은 공공기관장들을 꺾고 문제제기를 하는 언론들을 제멋대로 가꾸고, 의사표현 하는 시민들을 가지치기하면서 엉뚱하게도 시장자유화라는 명분으로 마치 계획경제를 모방하다시피 온 나라를 한 회사의 확대판으로 맞추어 목조하는 것 같다. 국가보안법도 모자라 소위 반테러법, 복면금지법, 시위피해 집단소송제 등을 비롯한 법 제·개정과 역사왜곡을 통해 민주시민의 새싹이 튼튼하고 건강한 큰 나무로 자라지 못하게 억눌러 기형으로 길들이려는 듯하다. 그리고 이러한 ‘원예가’들은 국민들을 이 뜰의 정원사로 취직시켜준단다. 참 별꼴이다! 당시 안압지를 설계한 7세기 사람들의 지혜와 21세기 사람들의 무지, 어떤 것에 대해 더 놀라워해야 하는가 헷갈린다.


<하네스 모슬러|서울대 대학원생>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0810171757265&code=990333

이 글을 읽으면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앞으로 질주만 하며 달려온 우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왜 열심히 일하고 피땀으로 노력하는지 그 목적을 상실한 시대가 되버린 것 같다.

여기 저기서 들리는 수많은 이야기중에서 우리는 왜? 라는 질문은 잃어버리고, 무엇을 위하여라는 말만 기억속에 저장해둔 것 같다.

게다가 이런 충고가 이방인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에 다시 한번 우리의 오늘을 생각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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