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만 생산하기 위해 기른 젖소들은 하루에 거의 380ℓ의 우유를 생산한다. 반면 목초지에서 기르는 젖소의 하루 생산량은 6ℓ이다 (본문 중에서).” 낸시 드빌이 쓴 <슈퍼마켓이 우리를 죽인다>
기본적으로 내가 채식을 지양하기도 하지만 , 여러 이유로 난 우유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 소화도 잘 되지 않는 음식을 몸에 좋다고 먹고 더부룩한 속을 감당하기도 싫고.
젖소 사육환경이나 젖소가 먹는 사료만 봐도 왜 우유가 완전식품이라는 의사들의 말을 신뢰할 수 없다. 관행농업으로 시작해서 공장식 축산까지 인간은 숨이 붙어있는 모든 것을 기계로 만들어버렸다. 모든 것이 효율성과 비용의 논리로 재단되며, 살아있는 것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마저 매몰시켜버렸다. 하지만 더 큰 비극은 돈에 눈이 먼 결과가 결국 인간에게 돌아온다는 사실.
나는 우리 시대가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먹는 시대라고 생각한다. 하나부터 열까지 손에 잡히는 모든 음식에 합성첨가물이 들어가 있으며, 밖에서 사먹는 대부분의 식재료의 품질에 의구심이 든다. 풍요속의 빈곤처럼, 먹는 것이 이제는 생존이 아닌, 선택과 기호의 시대가 되었지만 건강한 음식을 먹을 권리는 박탈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주변에 넘쳐나는 먹을 것 사이에서 진정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될까?
특히 마트는 우리 밥상을 망치는 가장 큰 주범이며, 거리에 즐비한 식당은 우리의 건강한 미각을 망치는 주범이다. 혀가 감지하는 미각이 우리의 건강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밖에서 사먹는 미각에 길들여지면 결코 우리 몸은 건강해질 수 없다.
바쁜 현대인의 일상은 원초적이며 필수적인 먹는 다는 것의 의미를 삶에서 분리시켜 놓았다. 바쁘다는 이유로 외식을 남발하고, 간편하다는 이유로 패스트푸드는 먹는다. 먹을 것의 생산과 소비가 거의 일치하던 시절에는 내가 먹는 것을 내가 생산하였기 때문에 그 품질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생산과 소비가 단절된 현대에 과거의 삶을 재현할 수는 없다. 문제는 그나마 유지되던 먹는 것과 그 조리과정마저 이제는 단절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입으로 들어가는 먹는 그 과정만이 남게 되고 그 과정마저 화폐에 의한 교환수단으로 변질되면서 그 중요성을 망각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먹는 것을 왜 우리가 선택해야 하고 옳바른 방법으로 조리해야 하는지 고민해야 한다. 물질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인간의 신뢰는 소리만 요란한 빈수레에 불과하다. 거리에 즐비한 마트와 식당이 우리의 건강을 보증하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이 돈의 최고의 가치로 등극한 현대의 비극이다. 돈때문에 농작물에 쳐서는 안되는 농약을 치기도 하고, 돈 때문에 소에게 소를 먹이기도 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다. 지금 우리에게 그 피해가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않기때문에 모를 뿐.
나는 녹생평론에서 늘 주장하는 공생공락의 가난, 이 구호를 깊이 공감하는 사람중 한 명이다. 물론 쉽고 아름다운 우리말을 두고 굳이 공생공락이라는 한자구호를 써야하는지는 의문이지만, 그 말에 담긴 뜻은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정신이다. 공생공락의 가난은 주어진 가난이 아닌 선택한 가난이다. 주어진 가난과 같이 극복의 대상이 아닌 모두가 같이 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삽질이나 해대면서 선진경제 운운하고 밤낮으로 선진화 구호를 부르짖어봤자. 남는 것은 파괴와 고통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함께 나누는 마음일텐데, 어찌하여 혼자만 잘 살겠다는 사람을 내세웠는지 모르겠다. 잘 살고 싶은 욕망에 뽑은 거겠지만, 그 어긋난 욕심에 대한 심판은 참혹하다. 광우병으로 대변되는 우리 식단의 위기만큼이나 딱 어울리는 사람을 뽑았다. 우유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또 이런 이야기까지 나왔나… 쯧쯧…
가끔은…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지옥으로 떨어지기 위한 중간 단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답니다…이 모든 특권이라는 것은 최고의 형벌을 받기 위해 아주 잠시 누리는 것이 아닐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 내가 받지 않아도 이 폭력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인류에게 되돌아올거라 생각합니다.
그전에 우리가 깨닫는다면 그것이 더 좋을텐데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