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로 나를 미워하라. 나도 단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

  동경 사이타마 러브소나타에서 제가 설교를 통해 한국인의 피해자라는 오만에 대해 용서를 구했을 때 일본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마음을 열기 시작한 것처럼 화해는 엄청난 일치의 능력을 가져옵니다.


러브 소나타, 일본 이야기 나오니까 대충 온누리 교회 같군요.


기본적으로 한 개인의 치열상 내적 영역에서의 오만에 대한 반성은 환영할 일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내적 영역과 외적 영역을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의 잣대를 여기저기 들이대는 분별없는 행동은 영락없는 오늘 날 개신교의 모습입니다.


“내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증오가 아니라 기억을 기초로 하는 정의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야기입니다. 개인의 영역은 자기 자신의판단이 우선이지만 개인이 모인 우리의 영역은 사실을 토대로 이야기하고 판단해야 합니다. 그것은 나가 아닌 우리 모두를위해서이니까요.


누구에게만 감동깊은 달콤한 이야기로 귀를 유혹할 것이 아니라, 옳은 소리의 우리 마음의 귀를 움직였으면 합니다…….. (중략)

mahlerian 님의 글에 대가 단 덧글이다. 교회문제로 속에 고민이 산적한 요즘 개신교회가 왜 이런식으로 변질되어 가는지 모르겠다. 용서는 가해자의 몫이 아니라 피해자의 몫이다. 왜 주제넘게 제3자의 화해의 이름으로 용서를 들먹이는 것일까? 그리스도를 믿는 그는 자신의 목숨을 화해의 제물로 바칠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화해와 용서를 위해서 이 세상을 창조한 하느님도 예수의 이름으로 십자가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셨다. 창조주 하느님도 당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완성하고 싶었던 가치를 어떻게 저리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용서도 좋고 화해도 좋다. 다만 우리는 감정이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분위기에 따라 장단을 맞추는 감정이 아닌, 어떤 바람에도 움직임 없는 사실에 판단의 중심을 두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감정에 흔들리지만 잊지말아야 할 것은 판단의 최종 결정은 사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것. 한 개인의 용서와 화해는 그 자체만으로 거룩한 행위이지만, 너와 나가 모여 만든 이 사회의 잣대는 달라야 한다.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을 분리해야만 하는 까닭은 단순하다. 이 둘사이의 거리가 애매모호할수록 사회와 그 구성원은 언제나 혼란을 경험했다. 멀리갈 것도 없이 서울시장으로서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대중앞에서 거리낌없이 쏟아냈던 지금의 대통령을 보면 알 수 있다. 그가 종교 사이를 이간질 한 것도 아니고, 다른 종교를 탄압한 것도 아닌데 스님과 신도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정부를 규탄했다. 그저 말 한마디일 뿐인데, 그들이 심하게 대응한 것일까?

읍참마속 [泣斬馬謖]이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제갈량이 군령을 어긴 마속을 군법에 따라 참수한데서 유래한 사자성어다. 제갈량은 그 재능과 가능성이 충만한 마속을 베면서 눈물을 흘렸다. 내 마음은 그를 벨 수 없지만 내 마음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모두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아끼는 마속을 구제해주면 제갈량과 마속의 마음은 편해질지 모르겠지만, 모두의 마음은 그때부터 흔들리기 시작한다. 제갈량은 동양에서 지혜의 상징으로 대표되는 인물이다. 그 오랜 세월 그가 지혜의 상징으로 대변되었던 것은 그가 똑똑해서만이 아니라 그보다 중요한 분별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루쉬은 죽기전에 ‘그대로 나를 미워하라. 나도 단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 강직한 그의 말속에서 나는 루쉰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아주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아큐는 속으로만 천하를 품고 살았다. 다른 사람이 어떠하든 그저 속에서만 천자처럼 살고 그것으로 자위하며 살았다. 총에 맞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아큐의 모습은 비단 지난 중국의 모습만이 아니라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 용서와 화해라는 미사어구로 사회는 거룩해지지 않는다. 사회가 건강해지는 길은 사실에 바탕을둔 냉철한 판단과 자기반성이다. 자기반성끝에 나온 냉철한 판단만이 사회와 개인 모두가 건강해지는 길이다. 용서와 화해를 들먹이며 모두 잊고 좋은게 좋은 것이라는 식은 영문도 모르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저 아큐와 다른 것이 무엇인가?

다시 말하지만 한 개인의 차원에서의 용서와 화해는 거룩한 행위이다. 용서하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거룩함은 더욱 더욱 빛을 발한다. 하지만 너와 나가 아닌 우리의 차원에서는 다르다. 너와 나 사이에 필요한 것은 용서와 화해이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공의, 모두를 위한 정의이다. 너와 나 사이의 달콤함에 취해 우리 모두를 갈아먹는 아큐가 주인인 시대이다. 루쉰은 사라지고 아큐만 북적이는 시대. 그래서 내일이 반갑지 않다.

‘그대로 나를 미워하라. 나도 단 한 사람도 용서하지 않을 테니까’”에 대한 2개의 생각

  1. 루신이 그런 말을 남겼었군여…전 종교에 대해 아무런 편견이 없지만- 정말 해서는 안되는 말일 수 있는데 -일부 기독교인들은 미움받는 법을 아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가 가끔 있답니다. 뭐랄까…주말에 모여서 그 난리(?)들을 쳐대는 이유가 주중에 너무 죄를 많이 지어서가 아닐까 라는 생각?

  2. ^^
    교회는 죄인을 부르는 곳이라는 생각이 있어서 그런지 전 교인 개개인의 자잘못은 그렇게 크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교회 전체의 모습이 어긋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죠.
    어째 이래저래 교회도 세상을 닮아가는 것 같습니다.
    지금의 혼란한 이 세상을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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