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낭소리



처음 영화 개봉 소식을 한겨레에서 본 것이 작년인데, 독립영화와 지방에 사는 이유로 지난 주에서야 이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기대를 많이 했지만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영화였다.

다큐지만 감독의 인위적인 개입이 많이 보여 사실 좀 거칠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부부과 늙은 황소의 모습은 진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가감없이 보여주었다. 다큐도 영화다. 다시 말해서 감독이 보고 싶은 것만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진정이라는 것이 감독의 시선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삶은 감독의 렌즈를 통해서도 굴절없이 감정의 선을 건드렸다.

징하디 징하게 일만 해온 소도 아프고, 소만큼 일만 해오고 살아온 할아버지도 아프다. 할아버지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 ‘아이고 아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할아버지 모습만 봐도 눈시울이 뜨거운데, 그 옆에서 말없이 40년을 함께 한 소의 모습은 눈물을 넘어 숭고함으로 느껴졋다. 평생 고된 농사일로 삶을 채워왔지만 그 아픈 몸으로도 할아버지는 일을 그칠지 모른다. 소라고 어디 아프지 않은 곳이 있을까냐마는 할아버지가 나서니 아픈 몸으로 절뚝절뚝 따라 나선다.

할아버지가 이 소는 나한테 사람보다 낫다고 말하는 모습은 결코 헛말이 아니다. 세상 그 누가 이 소처럼 할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단 말이냐. 평생을 고된 노동으로 내 몸을 깎아가며 일한 할아버지의 삶의 방식은 노동이다. 펜대가리 굴리며 책상에서 골몰하는 나같은 사람과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진실을 말할 수 있고, 정직을 말할 수 있다. 사실 영화 한편 보고 그 감상를 끄적거리는 나의 삶의 방식과 바짝 말라 쓸모없을 것 같은 한쪽 다리로 밭을 기어가며 농사짓는 할아버지의 방식은 차원이 다르다.



영화를 보고서야 나는 왜 우리 세대가 진보했다고 말할 수 없는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방식은 투박하지만 진실되었기에 그 많은 자식들을 다 키울 수 있었고, 소도 자연수명을 넘기며 40년을 살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방식이 거칠고 투박해 보여도 그 방식이 진실된 것이기에 15년이면 수명을 다한다는 소도 40년을 살 수 있었던 것. 할아버지가 나에게 보여준 것은 진실 그 자체의 힘이다. 진실은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다. 할아버지는 소때문에 그 고된 노동이 배가 되어도 불평하지 않는다. 소때문에 농약도 안치고 소때문에 힘든 꼴을 베어야 하지만 소때문에 할아버지는 그 고생을 마다하지 않는다.

미물이라고 사료나 먹이고 우리에 가둬키우면 그것이 신식이고 그것이 진보라 생각한다. 힘들게 꼴을 베고 농약도 안치는 저 늙은이를 시대에 뒤쳐진 구식이라 치부한다. 이런 사고방식속에서는 아무리 돈이 넘쳐나도 우리는 진보했다고 말할 수 없다. 생명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고방식이 넘쳐나는 이 세상은 그래서 발전이 아니고 진보가 아니다. 우리 세대가 이전 세대보다 건강하지 못하고 나아지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이자 원인이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울었다. 아파 죽겠다면서도 그 고된 몸을 이끌고 논으로 향하는 할아버지나 그 할아버지와 늘 함께 하는 그 늙은 소나. 말 못하는 짐승이라 천시하는 소가 얼마나 위대한가. 사람 세상천지 누가 이 소처럼 할아버지와 함께 할 수 있단 말인가. 이 늙은 소는 이 영화의 중심이다. 다 늙어 힘없고 처량한 모습이 측은해 눈물이 나고, 그 몸으로도 주인 할아버지를 따라나서는 그 모습이 경이로워 눈물이 난다. 소에게서 사람에게 없는 순명을 느꼈다. 기독교 신자인 나를 순명을 다해 주님을 섬기겠다고 다짐하지만, 이 그 말을 함부러 못 하겠다. 순명처럼 고귀한 단어는 아무에게나 바칠 수 없는 존귀한 것이니까.

겨울가뭄의 끝에선 것처럼 바짝 말라버린 내 마음도 이 늙은 소 앞에서는 눈물이 비처럼 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진실이고, 회복해야할 우리의 희망이다. 늙은 소때문에 이렇게 많이 울게될 줄 몰랐다. 영화 후반부는 사실 울다가 보지 못한 부분이 좀 있다. 아래 소와 봇짐을 나눠드는 할아버지의 모습도 울다 놓쳤고, 그 징한 평생의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는 코뚜레를 잘라내는 부분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소도 울고 할아버지도 울고 할머니도 울고 우리 모두 울었다.

워낭소리”에 대한 6개의 생각

  1. 전 이 영화의 트레일러만 보고도 펑펑 울어서 감히 극장에 가지 못하고 있지만….정말 가슴 아팠던 것은, 이 영화를 본 나름 한 지식 한다는 인간들이 고작 제게 한다는 말이 15년 산다는 소가 40년 사는 이유에 대한 제 이야기를 이해 못하더라는 것이더라는 것이죠. 이제 지식인들도 종말을 고해도 될듯~

  2. 블로그 이웃중에서도 쭈싱님과 이런 마음이 가장 잘 맞는 것 같아요. 우리는 언제즈음 풀한포기의 소중함을 가슴에 새기는 날이 올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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