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궁금하다. 지난 여름 내내, 내 새끼에게 미친 소를 먹일 순 없다며 두눈 부릅뜨고 소리치던 사람들이, 한우라면, 없어서 못 먹는 사람들이, 평균 수명의 곱절을 살며 죽도록 일해야 했던, 한우 이야기에 그토록 눈물을 흘리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무지 대화도 소통도 모르는 남자와, 반세기를 넘게 살면서, 그의 아이들을 나아 키우고 먹이고, 논으로 밭으로 소처럼 노동하며 인생을 다 보내야했던, 늙은 여성의 한 맺힌 푸념은, 그리 보조적이고 경박하게만 배치되는데, 어떤 페미니스트도 항의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지. 자신과 소의 늙고 병든 몸을, 꿈쩍도 못하는 순간까지, 가학적이리만치 부리고 또 부리는 사람에게서, 노동의 신성함과 소와의 우정을 느낀다는, 젖은 눈으로 도심의 극장 의자에서 일어서는, 그들의 노동관과 우정은 대체 무엇인지. 나는 정말 궁금하다.
나는 궁금하다. 지난 여름 내내 물대포를 맞아도 촛불을 꺾지 않았던 사람들이 과연 내 새끼에게만 미친 소를 먹일 수 없다는 이기주의자들인지. 늙은 소 이야기에 눈물을 흘렸던 그 많은 사람들이 과연 한우라면 환장한 사람들인지. 그 늙은 소가 그 고된 노동에도 평균 수명의 곱절의 수명을 살았던 이유가 그 가학적이리만치 부리고 또 부리는 노인의 잔혹함인지. 평생을 고된 노동으로 살아, 이제는 그 노동이 자신의 언어로 체화된 노인에게 따뜻한 사무실 책상에 앉아 펜대나 굴리며 평등과 자비에 대해 훈수 두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지. 감독이 보고 싶은 것만 카메라에 담겨진 이 주관적 다큐를 현실과 혼동하며 노동관과 우정을 들먹이는 것이 대체 무엇인지. 나는 궁금하다
김규항의 글에서 좋은 insight를 얻는 경우도 있지만, 어떨 때에는 윗 글의 경우처럼 어이없는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있더군요. 대단한 안목도 아니고, 누구나 머리속에 떠올려보긴 하지만 경우에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되어 넘어간 부분인데,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듯이 저러는건 전형적으로 제 개인적으로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자세입니다..
저도 대체적으로 진보적인 사람이 보수적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귀울리는 편입니다.
그런데 진보가 분열로 망한다라는 속언을 증언이라고 하듯이 나만 옳다는 듯한 착각을 볼 때는 사실 좀 어이가 없습니다.
김규항 저분이 이런 착각이 심한 분이 것 같습니다.
어쩌다 한두번도 아니고, 이 양반은 자주 그더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