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 이회영 육형제

김구 귀국시 같이 귀국한 우당 이회영 일가중 다섯째 이시영.
감격에 눈물을 흘릴 수 밖에 없었다.

우당 이회영 육형제가 모두 독립운동에 투신, 다섯째 이시영을 제외하고 모두 독립운동중에서 순국하였다. 병으로 아니면 옥중에서 사망했으며, 이회영의 형은 중국에서 독립운동에 투신중 굶주림으로 죽었다. 육형제중 넷째 이회영은 옥중에서 의문사 한다.

심산 김창숙과 더불어 이회영 일가는 조선의 얼마 남지 않은 사대부의 양심이었다. 이회영 일가는 사대부 누구와 비교도 되지 않는 명문중의 최고 명문가였다. 그 유명한 이항복의 후손이며 정승을 무려 10명이 넘게 배출한 조선 최고의 명문가였고, 부자였다.

그런 명문가 형제들이 나라의 위기 앞에서 전 재산을 털어, 중국으로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한다. 그 유명한 신흥무관학교의 실질적 설립자이기도 했고, 독립운동에 전재산을 헌납하였다. 남의 땅에서의 독립운동이 쉬울리가 없겠지만, 이회영 형제는 전 재산을 아낌없이 독립운동에 헌납하고 결국에 육형제 모두 비참한 생활을 연명하다 비극적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 엄청난 재산을 나라의 독립을 위해 망설임 없이 헌납했던 대가를 참혹했다. 이회영의 큰형은 독립운동중 굶주림으로 사망한다. 조선 최고 명문가이자 부자 가문의 형제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이들의 존재는 조선이 그나마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를 말해준다.

멍청하고 무능한 고종. 칼 한번 빼어들지 못하고 나라를 두손모아 상납한 무능한 임금이었지만, 그 밑에 이완용과 같은 놈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라의 위기 순간에 늘 이완용과 같은 놈들만 우리 역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회영 일가는 보여준다. 우리 역사를 통틀어 오블리스 노블리제의 사례를 찾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하지만 얼마 되지 않지만 이회영 육형제와 같은 위인이 없었다면 우리 역사가 얼마나 부끄러웠겠는가.

이들은 우리 역사의 보배이자 위안이 된다. 이들이 없었다면 우리가 과연 역사라는 것을 지금처럼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우리 역사의 보배인 육형제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이건영, 이석영, 이철영, 이회영, 이시영, 이호영

 

우당 이회영 육형제”에 대한 8개의 생각

  1. 처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처음 보는 사진입니다. 짧은 글과 사진만으로도 감동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내용이네요

  2. 저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이런 명문가가 오늘 날에 잊혀지는 것이 아쉽고 서운합니다.

    신분의 귀천을 넘어 육형제가 모두 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진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 역사, 나아가 세계를 통틀어 찾아보기 힘든데, 너무 쉽게 잊는 것이 아닌가 반성해봅니다.

  3. 그나마 이회영 선생 같은 집안이 있었기에 우리가 오늘날 더운 밥 먹고 사는 거지요.
    그런 이회영 선생이 아나키스트였다는 이유로 푸대접한 세월도 있었으니 우리의 반쪽자리 독립운동사가 온전한 제 모습을 찾은 것도 얼마 안 되었습니다.

    이전에 엘리자베스 영국여왕이 한국 왔을 때 안동을 방문했었죠. 모 연기자 종가댁에
    머물면서 양반문화 운운…그 방송을 보면서 얼마나 속이 씁쓸하던지.

    일제가 벌인 창씨개명을 가장 빨리 받아들인 곳이 경북 안동군이었습니다.
    당시 신문에도 보도되었고 만해 한용운이 유림의 고장이 어찌 그럴까 하고 개탄했을 정도니까요.

  4. 이회영 선생도 아나키스트였군요. 놀라운 사실인데요, 유생이 아나키스트라니… 유생의 독립운동에 부정적 생각이 강한 저에게 새롭게 다가옵니다.

  5. 근현대사를 공부하는 고등학생입니다. 수업 내용 외에는 야사도 잘 이야기 하시지 않는 선생님이 우당 이회영 선생의 이야기가 나오자 한 5분간 짧게 그 분과 형제 분들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그 당시 우당 선생 집안의 재산이 지금 돈으로 600억 정도가 된다고 하는데, 그만한 돈을 가졌든 못 가졌든, 그 누구도 쉽게 할 수 없었던 일을 해 주셨다는 게 정말 감사합니다. 님이 쓰신 글 처럼 무능한 왕, 매국노 이완용 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역사가, 식민지역사가 부끄럽지만은 않은 이유네요. 6형제 중 살아남은 이시영선생은 48년 1공화국에서 부통령에 취임하셨지만, 이승만의 비민주적 통치에 반대하여 51년에 자리에서 물러나셨다네요.(2대 대선-52년) 형제들, 재산과 맞바꾼 해방 조선에서 이시영 선생이 보았던 것이 분단된 조국, 식민통치시절의 친일파들이 그대로 떵떵거리고 있는 비민주 국가였다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뜬금없지만, 항상 드는 생각으로 이승만이 독림운동을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네요.각종 독립단체들의 수장만 맡았다는 사실에, 과연 이 사람은 진정 독립운동을 한 것일까, 한낱 경력이나 명성쌓기만 한 것일까, 의심스럽습니다.)

  6. 고등학생이 이렇게 트인 역사인식을 갖고 있다는 것이 참 기쁘네요. 우리나라 무장독립운동사가 하도 복잡해서 자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이회영 형제분은 반드시 알아야겠지요.

    부디 하우님과 같이 역사를 진실되게 아는 학생들이 많아져 이땅의 역사를 다시는 왜곡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7. 이회영에 대하여 좋은 글을 남겨줘서 잘 읽었습니다. 글 중에 고종에 대한 무능한 왕이라는 말씀이 있어서 한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아니라 저 자신도 지식이 짧지만 결론만 말하면 고종이 무능한 왕이다 라고 말하기에는 역사학자들과 경제학자들간의 논쟁이 있엇고, 그에 대해서 여러 해석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 생각에는 고종이 했던 근대화에 대한 노력과 나라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들에 대하여 제대로 조명이 되지 않았던 것은 또다른 식민사관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접하게 된 것은 이태진 교수님의 ‘고종시대의 재조명’ 이라는 책을 통해서 입니다. 이와 관련된 자세한 논의는 http://blog.naver.com/voltaire99?Redirect=Log&logNo=60097354938 홈페이지로 확인해보세요 ^^/

  8. 음…
    고종의 삽질에 대해서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있는 증거가 대한제국의 예산 사용내역입니다.
    검색해보시면 구한말 예산사용내역이 나옵니다.
    얼마나 어이가 없는지 그 자료보고서,
    고종이 한심한 임금이었다는 생각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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