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는 모국어의 울림


우리 말 – 리진


내가 잇고 난 피도
문제가 아니라고
하기로 하자
나를 낳아 축난 땅 앞에
갚아야 할 그 빚도 또한
문제가 아니라고 하기로 하자


그러나 어쩌면 좋니
이 마음의
온갖 정과
이 마음 한구석에서 꺼지지 않는
희망의 불씨의
목 쉰 소리는
오직
우리말로만 울리잖느냐?


                               – 리진 서정 시집에서


리진은 재중 러시아 교포시인이다. 이제는 뭐 나고 자란 땅에서 산 것 보다 러시아 땅에서 살아온 세월이 훨씬 길어 러시아 사람으로 불러도 무방할 것 같지만, 아직도 고집스럽게 북한 국적을 소유하고 불편한 외국인으로 러시아에서 살아가고 있다. 시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할 때마다 난 리진이 ‘우리말‘이라는 저 시가 늘 마음속에 떠오른다. 시는 다른 말이 아닌 모국어의 울림이라는 것. 현대의 우리는 시를 읽지만, 난 시는 읽는 것이 아니라 읊는 것이라 생각한다. 문자라는 것이 말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인 것이지 말을 대신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시를 말로 기록할 수 없어 문자로 기록한 것이지, 오직 문자가 시를 표현하는 전부다 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태초에 인류가 아름다움을 노래하기 시작했을 때, 말을 매개로 기억을 통해서만 전래되던 노래가 먼저 문자로 기록되고, 그 다음에는 악보로 기록되기 시작했다. 문자는 시가 되었고, 나중에 악보는 음악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결국 음악도 시도 모두 무엇인가를 노래한다. 노래는 인류의 가장 오래된 악기이자, 표현 수단중 하나이다. 입을 통해 전달되는 소리의 아름다움. 결국 문자로 기록된 시는 소리라는 대기중의 공명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에 수많은 시인들은 시를 통해 소리가 갖는 울림을 문자로 기록하며 그 가능성을 탐구하며 시험해 왔다.


내가 시를 문자로 기록된 모국어의 노래로 생각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다른 말은 안된다. 시는 오직 모국어라는 세계를 바라보는 틀과 창조의 세계속에서 가능하다고 본다. 모국어는 한 인간이 세상을 바라보고 그가 세상을 이해하는 창조의 장이다. 때문에 시인이 만들어내는 세상은 그의 모국어를 통해서 전달된다. 우리가 번역된 작품에서 느끼는 감동도 실은 그 감동이 많이 절감된 감동이다. 번역된 작품에서 느끼는 감동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모국어와 시인의 모국어 사이에는 쉽게 넘을 수 없는 강이 있다는 것.


시는 시인의 모국어가 만들어낸 위대한 창작물이다. 오늘 날 우리가 시를 읽는다라고 일상적으로 표현할 만큼, 시에 내재된 소리의 가능성을 많이 잊고 살지만, 아직도 나는 시는 모국어의 울림이라고 생각한다.


나라만큼이나 다양한 모국어의 울림이 문자를 통해서 이제 국경을 초월해 우리에게 전달되는 세계를 살고 있다. 비록 다른 모국어지만, 시를 노래한다는 공통점이 다양한 시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요즘의 시가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으로 흐르고, 문자에만 천착하는 것 같아 내가 생각하는 시의 본령이 많이 사라진 것 같다. 그래서 시를 읽는다는 것이 적합한 시대가 되어버린 것 같다. 김남주와 같은 시인은 투사로 시대와 결렬한 대척점에 서, 온갖 풍파를 다 겪었지만, 그의 시는 울림이 살아있었다. 시인이 직접 낭송한 그의 서정시를 들어보면, 그는 투사가 아닌 천상 시인이었다는 것과 함께 시는 글자보다 모국어의 울림으로 전달될 때 더 마음속 깊이 다가온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세계화라는 바람과 함께 많은 소수 언어가 사라지고 있다. 이것은 지금의 우리 시대가 수많은 시인들과 시를 함께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세계화라는 이 빛좋은 개살구가 수많은 모국어의 울림과 함께 인류의 자산인 시까지 함께 소멸시키고 있다. 영어 공영론이라는 허황된 주장이 횡횡하는 우리 사회가 회복되기 위해서는 태초부터 이땅에서 노래한 우리 선조들의 울림을 되찾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 울림을 찾기 위해 우리가 시를 배우고 못났지만 시를 써보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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