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유세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구는 6월 11일 한 정치집회에서 우리는 죽음으로써 이승만 박사께 복종하기를 맹세합시다 라고 외쳤다. 당시 애국 청년이었던 강원용은 훗날 “이때 어떻게 김구가 단정 애기를 들고 나온 이승만과 손을 잡았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구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자기 정체성이 없거나 약했다. 도진순이 지적한 바와 같이, 김구는 “유학, 동학, 불교, 기독교 등을 두루 편력하는 사상적 방황을 경험”하긴 했지만 “전통적 가치인 유학적 또는 의병적 신의를 중시하는 완고함을 지닌 행동지향형의 인물이었다”
김구는 한 살 위인 이승만을 깍듯이 “형님”이라고 부르고 이승만이 나가던 교회까지 따라나갈 정도로 “형님”에게 극진한 대접을 했는데, 김구의 그런 개인적인 의리와 신의에 대한 집착이 영향을 미쳤던 건 아닐까?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는 미소 점령군 관할구역에서 유엔임시의원단의 감시 하에 각각 선거를 치르자고 제안한 미국의 결의안을 다수결로 채택했다. 이 중요한 국면에서 김구는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김구는 1947년 11월 24일 남한 남독선거는 국토 양분의 비극을 가져올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1주일 후인 11월 30일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했다. 그날 김구는 이승만을 방문해 한 시작정도 면담한 후, 자신과 이승만은 조금도 근본 의사의 차이를 보지 못했다고 말하면서 사실상 단독정부 참여의사를 밝히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이틀 후인 12월 2일 일어난 장덕수 암살 사건을 두 사람의 협력관계를 끝장내는 동시에 파국으로 끌고 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김구는 자신이 배후로 의심받자 이승만에게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승만은 “ 김 주석이 고의로 이런 일에 관련되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며 사실상 김구 관련설을 강하게 암시하는 등 딴전을 피웠다.
분노한 김구는 이승만과 완전히 결별했다. 김구가 단정론의 철회와 남북협상론을 들고 나온 것도 바로 그런 인간관계 파탄 직후였다. 이제 김구는 더 이상 우익 지도자가 아니었다. 김구는 이 사건을 계기로 좌우를 초월한 진정한 민족주의자로 다시 태어났다.
김구의 노선 전환과 함께 그간 김구를 지지해온 우익 세력이 떨어져 나갔으며, 우익의 공격이 불을 뿜기 시작했다. 1948년 4월 1일, 이승만도 남북협상을 주장하는 김구와 김규식에 대해 “대세에 애매하다는 조소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그런 비판에도 불구하고 김구는 4월 19일 북한행 길에 올랐다. 그날 김구가 머물던 경교장 일대는 그의 북행을 저지하려는 군중 때문에 대혼란이 벌어졌다. 김구는 “가야만 해. 38선을 베고 죽을망정 가야 돼!”라고 외치며 북행을 감행했지만, 5월 5일 별 성과 없이 서울로 돌아왔다. 이후 김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위한 5.10 선거를 거부함으로써, 보수 세력의 독식을 가능케 해주었으며, 무력하게 분단을 지켜봐야 했다. “이대로 가면 한국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는 김구의 피맺힌 호소는 곧 현실이 되고 말았다.
돌이켜 보건데 통탄할 일이었다. 김구의 방향 전한은 너무 늦었고, 막판의 선택은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이와 관련 최장집은 “급변하는 사태의 복합적 국면을 이해하고 이에 대응하는데 김구만큼 더디고 효과적이지 못한 지도자는 많지 않다”는 평가를 내렸다. 특정 상황에서의 지도자의 위상과 역할에 대한 사회적 ‘기회비용’이라는 것이 있다면, 김구는 그 점에서 비판 받아 마땅한 지도자였는지도 모른다.
재미있기도 하고 놀라운 건 한국의 정치인들이 존경하는 지도자는 왜 한결같이 김구인가 하는 것이다. 예외를 본 적이 있는가? 물론 김구는 적어도 죽기 전 보여준 1년여의 활동만으로도 존경받아 마땅한 지도자였다. 그러나 열에 한 명이라도 김구 이외의 다른 지도자의 이름을 댈 법도 한데 도무지 그런 정치인을 구경할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해방정국의 중간파 지도자를 존경한다고 말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승만을 존경한다고 말하기엔 이승만이 저지른 과오가 크고 많은데다 너무 뜨겁다. 그래서 우익 지도자 가운데 가장 괜찮은 인물을 찾다보니 늘 모범답안을 찾다보니 김구로 쏠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범답안에 위선의 기색이 역력하다. 김구가 죽기 전 1년여 기간동안 보여준 활동은 전형적인 중간파 지도자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너무도 늦게 중간파에 합류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뒤늦음’을 탓하는 목소리는 약했고, 김구보다 앞서 민족의 화합을 부르짖었던 정통 중간파 지도자들을 멀리하는 풍조는 여전하다. 이는 아직도 우리가 1940년대 후반에 구축된 체제의 틀 속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 유형상 이승만적 요소와 김구적 요소를 모두 갖춘 그런 지도자가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어리석을망정 오늘날에도 간절하다. 역사는 거대한 흐름들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 흐름의 한복판에 선 지도자의 사고방식, 행태의 방법론에 의한 방향과 내용을 달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강준만 교보 사람과 책 8월호 중에서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그 사람의 흠결까지 포함되어 내려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박정희가 공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가 나쁜 놈이라 불릴 수 밖에 없는 것은 그의 치부가 잊고 가기에 상처가 너무 깊기 때문이다. 이는 비단 김구에게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우리가 한 인물을 안다고 말할 때에는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 업적과 치부까지도 모두 알아야 한다. 이것은 바꿔말해 결과뿐만 아니라 그 과정까지도 온전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를 통틀어도 존경할 만한 인물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때문에 단재 신채호나 장준하 선생님같은 분들이 더욱 더 빛을 발하는 것이다. 단재나 장준하에게 흠집이 없었을리는 만무하지만, 그래도 우리가 그분들을 존경하는 것은 삶의 원칙과 그 과정이 자신의 신념과 배치되는 곳에서 타협은 찾을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올바른 시대정신과 먼 후일을 내려다보는 또렷한 시각을 갖고 있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신념과 과정의 길에서 고집스러울만큼 치열하게 걸어왔다.
김구가 훌룡한 분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천편일률적으로 김구를 존경한다느니, 추상적인 떠올림을 되집어 그 인물을 평가하는 지금의 세태가 문제라는 것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사당에 이승만 흉상이 세워져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의사당에 출입하는 국회의원이라는 분들의 생각이 딱 이정도 수준이다.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중학교내 파출소 설립의 업적을 갖고 있는 이승만만큼의 수준이다.
내가 존경하고 존경하는 함석헌 선생님도 예외가 아니다. 시대의 양심으로 누구보다 떳떳하게 삶을 살아온 함선생님이지만, 선생님의 삶에도 흠결이 드리워져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허물을 들쳐내는 것을 금기시하고, 누구 하나 그분의 흠결을 말하려들지 않으니, 이제는 민주화의 영웅, 시대의 양심 함석헌 선생님만 남게 되었다.
물론 이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함선생님도 여자문제로 스승인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속을 꽤나 썩혔다. 함선생님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하였음에 한 치의 의심도 없다. 내가 존경하는 함선생님의 치부를 이야기하는 것도 그 사람을 온전하게 알고자 함이다. 그분의 흠집이 있다고 해서 그분의 위대함이 그분의 사상이 시들어지지 않는다. 그분의 흠결까지도 알고자하는 것은 그 사람을 온전하게 이해하고 알고자 하는 노력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흠결이 없을 수는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부끄러운 치부일지라도 모두 부둥켜안고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온전함으로 나아가는 첫 번째 길이기 때문이다.
잘 읽고 가요. 누군가에 대한 맹목이야말로 가장 경계시할 문제입니다.
맞는 말씀이십니다.
맹목적인 추종이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결혼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
요즘 ‘<문명>하셨습니다(?)’ 에 나오는 마하트마 간디… 비폭력 무저항 개뿔!! 최근에 알게된 간디는 역시나 제가 5시간짜리 전기영화에서 벤 킹슬리의 열연으로 보았던 그 분이 아니었습니다. ㅋㅋ~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경이 사라지지는 않더이다. 마찬가지겠지요? 인간인 이상 인간 이상의 것을 상상하고 존경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 인물 속에서 내가 배워야 할 점이 있다면 취할 것이고 아닌 점이 있다면 그것 역시 ‘아, 이렇게 살면 안되는구나’ 깨달을 뿐이겠죠. 가급적 전자의 부분이 많으면 <존경>할 만한 사람이 되겠고요. ㅎㅎ~ 젤리님… 언제나 신의 은총과 자비가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
언제나 보고 싶은 호연님.
언제고 꼭 봐야 하는데 마음 뿐입니다.
그래도 제 마음 아시죠. ^^
좋은 소식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