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을 겪지 않으면, 기쁨을 누리지 못하듯… 피아니시모를 연주하지 못하면 포르티시모가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첼로에 있어서 단 한명의 높은 봉우리, 로스트로포비치가 남긴 말이다.
현대 첼로 역사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온 비르투오조 로스트로포비치가 이런 말을 남겨서 꽤나 놀란 기억이 있다.
강렬한 보잉과 초인적인 기교로 한 시대를 풍미한 거장의 삶을 돌아보면 기교의 최일선에 서 있단 그가 인생의 시련을 겪고 난 후에 달라진 그의 삶과 음악에 대한 태도를 보여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로스트로포비치가 이 말은 시베리아 유배 이후에 했는지 이전에 했는지 정확한 기억이 없다)
누구나 피아니시모를 연주 할 수 있지만, 누구나 피아니시모로 사람의 감정선에 다다를 수는 없다. 포르티시모를 자신 있고 화려하게 남발 할 수록, 청중은 열광하고 인기를 얻을 수 있겠지만, 피아니시모를 이해하지 못하는 포르티시모는 한 여름밤의 꿈과 같이 무거운 휴유증만을 남길 뿐이다. 역사를 조금만 거슬러 올라가도 얼마나 많은 천재들이 혜성처럼 등장했다,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는지 쉽게 찾을 수 있다. 리스트를 폄하하기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피아노 줄을 쉴 새 없이 끊어버리는 그의 괴력을 뒷받침해주는 그의 엄청나게 많은 화려한 곡들이 오늘 날 과연 얼마나 연주되는지 생각해 보자. 또 리스트가 그의 말년에 젊은 날의 초인적인 기교들에서 물러나 영적이고 정신적인 세계을 탐미하고 그의 피아노 세계가 그것을 찾아떠난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로스트로포비치의 저 말은 음악이나 삶에 있어서의 진실을 말해준다. 시련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그 후에 다다를 성장을 위한 수단이다. 결국 시련을 뛰어 넘고서야 우리는 비로소 다음 시련을 앞에 두고 한층 더 성장했다고 고백할 수 있는 것. 음악가에게 있어서도 피아니시모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비극이 필요하다. 우리 전설처럼 추앙하는 위대한 음악가들중 시련을 거치지 않은 음악가가 과연 있었던가. 미켈란젤리는 2차 세계대전의 포화속에서 전쟁포로가 되었다 탈출하였고, 올리비아 메시앙은 포로용소에서 세상의 종말을 위한 4중주를 작곡하였다. 슈베르트 베토벤, 더 언급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누구나 연주할 수 있는 피아니시모지만 누구도 감히 피아니시모를 연주 할 수 없다.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가 슈베르트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 D.960을 연주 할 때 우리는 침묵에 빠져들고 그가 연주하는 2악장의 긴 호흡속에서는 한 없는 심연의 끝에 서 있는 것처럼 느낀다. 그 짧은 순간에서 영원을 느낀다는 표현은 리히터가 연주하는 슈베르트의 마지막 소나타에 대한 리히터의 절절한 고백이자, 그의 피아니시모를 가능케 한 그의 지난 날의 고백이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삶 자체가 자기파괴적인 측면을 갖고 있다. 외적인 시련 뿐만이 아니라 내면의 시련까지 스스로가 엄격한 시련속에서 자신을 통제한다. 미켈란젤리가 아픈 심장을 지닌채 끊임없는 연습에 몰입한 것도 자기파괴적인 한 단면이다. 그의 삶이 종적을 겉잡을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도 자기파괴적이기까지 한 완벽주의속에서 전혀 타협을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고.
오늘 날의 연주자들은 단면을 보면 기술이라는 측면에서 과거의 연주자들은 이제 더 이상 자리를 잡기 힘들다는 생각까지 들 정도이다. 라흐마니노프나 미켈란젤리처럼 절대적인 피아니즘 그 자체로 평가받는 소수의 연주자를 제외한다면, 과거의 명인들은 손가락 솜씨는 고등학교 콩쿨에서도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코르토가 연주하는 쇼팽의 겨울바람 연주를 오늘 날 재현한다면 어느 평론가가 비웃지 않겠는가.
하지만 오늘 날 연주자들의 음색은 하나 같이 똑같다. 모두 똑같은 음반을 듣고, 똑같은 해석을 참고 한다. 다른 연주자들의 연주를 일체 듣지 않았던 호로비츠와 같은 자세는 오늘 날 비웃음을 받을지 모른다. 대신, 우리는 현란한 비르투오조의 홍수 시대를 살면서도 똑같은 음악을 들어야 하는 고문 아닌 고문을 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물론 오늘 날의 음악계를 경시하는 생각은 전혀 없다. 오늘 날에도 좋은 음반은 만들어지고, 좋은 음악가들을 통해 좋은 음악을 듣고 있지 않은가. 다만 점점 획일적인 문화, 연주가 세상을 뒤덮고 있는 것이 아쉬울 뿐.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쓰면서 이런 쓸데 없는 글을 장황하게 쓴 이유는 갑자기 이소라 생각이 나서다. 나는 가수다를 통해 이소라의 노래를 들으면서 그녀가 노래 잘하는 보통 사람도 넘쳐나는 이 시대에 얼마나 귀한 음성을 지니고 있는지 다시 발견하게 된다고 할까. 이소라를 보면 그녀가 압도적인 성량을 지닌 것도 아니고, 폭 넓은 음역대를 가진 것도 아니다. 김범수나 박정현처럼 청각적 쾌감을 주는 고음을 가진 것도 아니고 기교를 지닌 것도 아니다. 물론 그녀는 안정적인 호흡과 여성에게 찾아보기 힘든 매력적인 중음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그녀의 매력을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소라는 아주 예민한 그의 감정으로 세상을 살아오면서 받은 그녀의 상처들이 노래를 통해서 배출되는 것 같다. 단지 상처와 아픔만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그녀 자신을 연소시키며 슬픔을 불태우며 노래한다. 기쁨이 아니라 아픔을 노래할 때 내가 그녀의 음악에 더 동감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 아닐까 생각한다. 물로 나만의 착각일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난 이소라의 호흡까지도 음악으로 느낀다. 그건 내가 그녀가 피아니시모를 이해하기 위한 아픔을 견디어 왔다고 생각하기 때문. 그녀는 포르티시모보다 피아니시모를 더 잘 노래하고, 태양보다는 달을 노래하는 가수다. 그녀는 달을 노래하면서도 보름달이 되지 못한 결핍을 안고 노래하는 가수다. 그녀의 눈썹달 음반을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도 이 음반의 표제가 그녀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제 송창식의 사랑이야를 노래하는 이소라의 모습에서 누구도 송창식처럼 부르지 못할 노래를 또 다른 송창식이 되어 부르는 이소라의 모습을 보았다. 깊은 한숨을 이해한 사람이 부르지 못할 피아니시모는 세상에 없다.
잘 읽었습니다. 정말 오랫만에 읽고 오랫만에 댓글을 달게 되네요. 더운 날에 건강하시길.
이렇게 덧글까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블로그를 멋지게 운영하시네요.
저도 종종 들러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