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선생이다, 황현산

이 책을 진작부터 읽어야지 하다 근래 다 읽었다. 하도 인상깊게 읽어서 다른 책도 사서 보았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지식인으로 살고 쓰고 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책. 권정생 선생님과는 대척점에 서있다고 볼 수 있는 지적이고 세련된 문체가 담긴 글. 나는 이런 먹물의 향연을 아주 싫어하는 편인데, 황현산의 글은 격조가 묻어난다. 읽다보면 마다할 수 없는 매력이 묻어난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는 사람이 제대로 된 글을 쓰기 까지 얼마나 많은 연마의 시간이 필요한지 황현산의 자전적 고백을 통해서 새삼 깨닫는다. 세상에 고민없이 쉬이 써지는 글은 없다.
 
글을 읽다 그 글에서 품격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고등지식의 나열은 사전에 불과하고, 공감없는 글은 감정소모에 지나지 않는다. 황현산의 글은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나 지나침 없다. 모국어로 한국어를 사용하는 이에게 선사하는 호사라고 부를고 싶을 정도.
 
얼마전에 세상을 떠난 그를 노욕으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지만, 죽기 얼마전까지도 깨끗한 정신으로 모국어의 한 단면을 장식한 그를 기억하는 나 같은 사람도 있다.

신앙에 대한 회의

마녀의 고민을 읽다보니 새삼 공감되는 면이 있어 몇 자 적는다. 함석헌은 과학와 신앙의 싸움에서 영원한 승자는 과학이고 그래서 과학을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함석헌은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인 신앙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짊어지고 갔다. 왜 그랬을까?

우주라는 이 절대적 영역을 이해해가는 인간의 능력을 볼 때마다 나의 종교적 신심이 미약해져 가는 것을 느낀다. 얼마전 중력파에 대한 설명을 담은 동영상을 보며 나의 이 신앙이 얼마나 초라해져가는지, 솔직히 말해서 이런 거대한 과학 앞에서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았다.

굳이 물리학과 같은 거대 담론이 아니더라도 인간이라 해서 굳이 특별한 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담긴 것도 아니다. 기독교라고 해서 다른 종교에 비해 우월하다거나 더 특별한 것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 나는 왜 기독교를 믿어야 하는가?

여기까지 오면 종교를 버려야 하는 것이 옳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안하는 것. 여전히 나는 신앙고백을 하며 성당에 나간다. 선한자들의 불행은 하느님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세상이 운영되는 원칙, 우연성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일절 인간의 의지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 죽고 살고 불행과 행운의 차이는 내가 선하고 악하고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공평한 우연의 문제. 여기에 다다르면 파스칼이 고민하고 방황했던 것 처럼 하느님의 영역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신이 되는 날이 오면 나도 신앙을 버릴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죽음을 건너 다다르지 못하는 내 마음을, 죽음 그 후를 건너고 싶은 내 생각을 진로를 바꾸지 못한다. 요즘은 이렇게 흔들리며 하느님을 의심하는 것이 신앙이라는 생각이 든다.

불자였던 내가 기독교 신자로 개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좀 신비한 종교적인 체험과 관련이 있다. 굳이 말할 필요는 없는 이 체험을 통해 하루 아침에 나는 불교도에서 기독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 속에서는 우주의 한 부속품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보통성 그것이 가져다 주는 합리적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해준다는 성서 말씀과 달리 과학이라는 진리는 나를 더욱 더 불편하게 만드는 것.

나는 아직 죽음을 뛰어넘는 인류의 필사 노력이 담긴 종교를 부정하지 못하겠다. 그것은 나 자신을 나 스스로가 부정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나라는 차원을 넘어 인류가 그토록 갈구했던 세계는 결국 인간이 다을 수 없는 곳에 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