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봉(玉峰) 이씨(李氏)

가림세고(嘉林世稿)에서….


                               옥봉(玉峰) 이씨(李氏)


近來安否問如何,   요즈음 안부가 궁금하니 어떠 한가요,
月到紗窓妾恨多.   창문에 달 비치면 새록새록 님 그립네.
若使夢魂行有跡,   꿈속의 혼백이 가는 길, 발자국 남기기로 하자면,
門前石路半成砂.   님의 집 문 앞, 돌길 반은 모래 되었을 것이외다.


참고: 옥봉(玉峰) 이씨, 그녀의 이름은 원(媛)이고 호가 옥봉이다. 옥봉은 충북 옥천군수를 지냈던 이봉(李逢)의 첩실의 딸 이였으나, 제 14대 선조의 생부인 덕흥대원군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왕손의 후손답게 당당하게 자랐다. 옥봉은 어린 나이에 총기가 밝고 재기가 있어 시문에 능하였다. 어린 나이에 제법 염과 운을 맞추어 시를 짓더니, 감탄하리 만큼 청아한 시구를 읊어 내기도 하였다. 첩실의 딸이었으나 아버지 이봉은 손안의 구슬처럼 아끼고 사랑하였으며, 옥돌이 솟아 오른 듯 아름다운 봉오리, 즉 옥봉이라 호를 지어 주고, 딸의 시 공부를 위한 책들을 아낌없이 사주었다. 자라면서 아릿다운 몸매를 갖추었고 괞찮은 집안에 출가했다가 일찍 본남편을 여의었다.


옥봉 이씨는 이때부터 한 많은 삶이 시작되었다. 한번 결혼했던 여성은 재혼할 수 없었던 시대였다. 절해고도에서 한 많은 젊은 시절을 보내야 했던 옥봉은, 그녀의 재기를 아껴 오던 아버지 굴욕적인 노력에서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었다.  당시의 선망적 인물인 조원(趙瑗 1544-1595)은 남명 조식의 수제자로 율곡과 나란히 과거에 급제한 인물이었는데, 이미 승지의 벼슬을 지내고 있었다. 옥봉의 아버지 이봉은 굴욕적인 자세로 조원을 찾아가, 자기의 딸 옥봉을 소실겸 풍류반려로 받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하였다.


얼마후에 조원은 장인 이준민(李俊民 1524-1590) 앞에 불려가 앉아 있었다. 이봉의 딸 옥봉의 과거가 있기는 하나 시재(詩才)가 뛰어나 풍류반려로 맞아 들일만 하니 받아주라는 권유였다. 조원은 장인의 권유에 못 이겨, 옥봉을 부실(副室)겸 풍류반려로 맞아들이게 되었다. 딸의 재능을 아끼던 이봉의 굴욕적인 자세로 조원의 장인을 찾아가 담판을 낸 결과였다. 그래서 장인이 택일하여 사위의 부실을 데려온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조원은 옥복을 받아들이는데 조건을 붙였다. 남편에게 부담이 되는 글을 쓰지 말 것을 맹세하라 했다. 옥봉은 맹세하였다.


여염의 여인이 시를 짓는 건 지아비의 얼굴을 깎아 내리는 일이라면서, 자신의 시는 외로움과 허망함의 발로였으니 지아비를 얻으면 시를 쓰지 않아도 좋으리라고 맹세 한 것이다.


세월이 흘렀다. 옥봉 이씨에게 행복한 나날이 계속하여  이어질 수만은 없었다. 어느 날 조원 집안의 산지기 아내가 찾아와 하소연하였다. 


남편이 소도둑 누명을 쓰고 잡혀갔으니 조원과 친분이 두터운 파주목사에게 손을 좀 써달라고 했다. 사정을 들어 본즉 아전들의 토색질이 분명했다. 옥봉은 파주목사에게 시 한 수를 써보냈고, 바로 이 글의 힘으로 집안의 산지기 남정네가 무사히 풀려났다.  그러나 후에 이일을 남편인 조원이 알게 돼서, 부녀자가 함부로 송사에 관여했다는 이유로 남편인 조원은 화를 내며 면박을 주었다. 뛰어난 시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능력이 칭찬의 대상이 되기는커녕 남편에게 버림을 받고 만 것이다. 그래서 이 일로 옥봉은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조원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여자와는 살 수 없다”며 내친 것이다. 옥봉은 눈물로서 사죄하였으나 조원의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우리 역사에서 시기(詩妓), 즉 기생으로서 시를 지어 남정네의 풍류반려가 된 여러 가지 사례는, 흔히 일간지나 월간지의 기사 내용을 장식하여왔다.  그러나 옥봉 이씨는 출신 신분 때문에 시기가 아닌, 한 남정네의 소실로 들어가 풍류반려의 역할을 잘 하여 오다가, 글재주에 열등감(?)을 느낀 남편의 자격지심에 하찮은 내용으로, 그것도 시 한 구절 때문에 쫓겨나, 평생을 방황 하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갈곳이 막막하여, 처절한 모습의 죽음을 택하여, 평생의 시고를 온 몸에 싸 감고 바다에 투신함으로서, 그 시신이 서해 바다를 떠돌다가, 중국에 건너간 기이하고도 애절한 사연이 이채롭다. 그러나 목능성세(穆陵盛世)에 그녀는 글재주를 다 발휘하지 못하였으니, 임진왜란 때문 이였다.   


이렇게 옥봉은 첫 번째 남편을 여의고, 두 번째 남편에게도 글재주로 버림을 받게 되면서 고독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런 자신의 삶에 대한 한탄과 남편에 대한 기다림은 급기야 마음의 깊은 병으로 도져서, 우울한 일생을 산 것이다. 다음의 시는 이런 심정이 적나라하게 나타났다고 할 수 있는데 읽는 이의 마음까지 아리게 한다. 옥봉 시의 진수는 사랑에 있다. 그녀의 시는 그녀의 인생만큼 간절하고 안타까움을 남겨 읽은 사람들에게 오랜 여운을 남기고 있다



平生離恨成身病   평생동안 이별의 한, 이 몸에 병이 되어,
酒不能療藥不治   술로도 못 고치고, 약으로도 못 다스려.
衾裏泣如氷下水   이불 속 흘리는 눈물은, 얼음장 밑에 물과 같아,
日夜長流人不知   밤과 낮을 길게 흘려도 그 뉘,  알아 주리오.

혹시나 다시 남편의 부름이 있지나 안을까 하여 그리움 속에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또 한편의 간절하고 호소력이 있는 시를 남겼다. 쫓겨난 여인네의 애절함이 돋보이는 내용으로,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옥봉은 이 시를 남편에게 보냈지만 조원은 끝내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조원이 좀더 너그러운 사람 이였다면 이런 시를 보고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近來安否問如何,   요 지음 안부가 궁금하니 어떠 한가요,
月到紗窓妾恨多.   창문에 달 비치면 새록새록 님 그립네.
若使夢魂行有跡,   꿈속의 혼백이 가는 길, 발자국 남기기로 하자면,
門前石路半成砂.   님의 집 문 앞, 돌길 반은 모래 되었을 것이외다.


한겨례신문 1997년 7월 17일자 문화란 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싫려 있었다.  “조선 인조 때의 일이다. 승지 조희일(趙希逸)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그곳 원로 대신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조원을 아느냐”는 물음에 조희일이 부친이라 대답하니, 원로 대신은 서가에서 <이옥봉 시집>이라 쓰인 책 한 권을 꺼내 보였다. 조희일은 깜짝 놀랐다. 이옥봉은 아버지 조원의 소실로 생사를 모른 지 40여 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옥봉의 시집이 어떻게 해서 머나먼 명나라 땅에 있게 되었는지 조희일 로서는 짐작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로대신이 들려 준 이야기는 이러했다.


40년 전쯤 명나라 동해안에 괴이한 주검이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나 흉측한 몰골이라 아무도 건지려 하지 않아 파도에 밀려 이 포구 저 포구로 떠돈다는 것이었다. 사람을 시켜 건져보니 온몸을 종이로 수백 겹 감고 노끈으로 묶은 여자 시체였다. 노끈을 풀고 겹겹이 두른 종이를 벗겨 냈더니 바깥쪽 종이는 백지였으나 안쪽의 종이에는 빽빽이 시가 적혀 있고 ‘해동 조선국 승지 조원의 첩 이옥봉’이라 씌어 있었다. 읽어본즉 하나같이 빼어난 작품들이라 자신이 거둬 책을 만들었다고 했다. – – – – -”   글의 끝 부분에 기고자는 박은봉 역사 연구가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옥봉 이씨의 시가 조선 여류시인들 중에 그 누구의 것보다도, 난설헌의 시와 함께 청나라에서 간행된 명대(明代)의 시인 선집인 <열조시집(列朝詩集)>이라든가, <명시종(明詩綜)>에 여러 편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 시집들은 명나라 시대를 대표하는 종합적인 시집들이다.


그러나, <열조시집>에서는 “임진왜란을 만나 죽었다”고만 되어 있고, 장지연의 <일사유사(逸士遺事)>에서는 “임진왜란을 만나 어디서 죽었는지 알수 없다”고 하였다. 조원의 고손 조정만이 남긴 <이옥봉행적>에는 “비록 쫓겨났어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고 자신을 단속해서 전란 속의 어려운 시절에 정절을 보전하였다, 마침내는 천하 사람들이 아름답게 여기게 되었다. 그 삶은 불행하였으나 그 죽음은 불후하였다”고 서술하였다. 그리고 조정만은 조원의 문집인 <가림세고(嘉林世稿)>을 편집하면서 그 부록에 옥봉 이씨의 시 32편을 싫고, 그 시들의 앞 부분에 “이씨는 종실의 후예로 운강공 조원의 소실이며 옥봉은 그 호이다. 작품 32편이 있는데, 애석하게도 그 죽어 묻힘에는 전함이 없다. 이에 책의 끝에 올린다. (李氏宗室後裔而雲江公小室, 玉峰其號也. 有所作三十二篇, 惜其埋沒無傳, 玆附于券末)” 고 하였다.


옥봉 이씨의 죽음에 관하여는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어느 곳에서,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는 것이 고손 조정만이 남긴 기록이다. 남편 이였던 조원의 묘소는 경기도 파주 땅에 있으나, 조원의 비문에는 옥봉 이씨에 관하여 단 한마디의 언급도 없다.



 

자료출처: ‘사단법인 동방문화 진흥회’에서 2005년 6월에 간행한 <동인>지에 <못네 정겨운 여인들의 비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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