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아픔에 풀들이 울고 있었다’

-아동문학가 권정생선생의 흙집을 찾아보니--


사용자 삽입 이미지“정생이 집? 저기제, 저기.”


낮술로 불콰해진 마을 어귀의 한 촌로는 서울에서 온 객의 소매를 끌더니 저 너머 둔덕을 가리킨다. 일러준 대로 고샅길을 따라 올라가니 과연 ‘권정생’이란 종이 문패를 붙인 토담집이 나타났다.
 
경북 안동시 일직면 조탑리.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67)의 5평 남짓한 집은 마을의 가장자리에 나앉아 있었다. 울도 담도 없이 홀로 떨어진 누옥. 붉은색 슬레이트 지붕의 이 흙집은 주인의 검박함보다 먼저 궁기를 떠올리게 했다.


툇마루가 없는 탓에 창호지 붙인 방문을 열면 바로 바깥이다. 쇠 문고리와 돌쩌귀는 녹이 잔뜩 슬었고, 모퉁이에 놓인 호미, 낫, 종다래끼, 쇠톱에는 손길이 간 지 오래인 듯 마른 흙이 달라붙어 있다. 인적이 끊기지 않았음을 확인해주는 건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고무신 한 짝과 희미하게 돌아가는 전기계량기뿐이다. 아동문학계 큰 어른의 집이라 하기엔 보는 이가 면구스러울 정도다.
 
“권선생님 계신가요?” 몇 번을 불러도 인기척이 없다. 19살부터 앓은 폐결핵 탓에 병을 달고 산다는 그이기에 글쓸 때 빼고는 꼼짝없이 구들장 신세일 터. 권선생의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문을 열고 재차 방문객의 존재를 알리자 저 안쪽에서 “누구요?”하는 쇠잔한 목소리가 들린다.


핼쑥한 모습으로 나타난 그는 문지방 너머에 꼿꼿이 선 채로 눈을 끔벅였다. 예상했던 대로 취재 목적의 방문이 영 내키지 않는 표정이다. 봄비가 추적추적 흩뿌리고 있었지만 손님을 안으로 들일 태세가 아니다.


“할 말이 없슴미더. 기냥 가시이소.” “신문에 나오고 할 게 없슴미더.”


그는 계속 양손을 비비고 매만지며 송구한 태를 냈다. 몇 마디 말을 튼 차에 신발이라도 벗으려 하자 단호하게 손을 내저었다. 그의 단단한 고집 앞에 입가를 맴도는 많은 질문들은 속절없이 발이 묶였다. ‘어린이날 특집’ 삼아 찾아오긴 했으나 이쪽 욕심만 차린 것 같아 부끄러웠다. 그는 방 안에서, 이쪽은 문 밖 처마끝에 선 채로 한동안 서로의 어색함을 견뎠다. 그러다 간간이 이쪽에서 가볍게 물었고, 그는 그 물음마저 박절하게 내치진 않음으로써 최소한의 손님 대우를 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그냥 가끔 숨 쉬러 밖에 나오는 정도지요.”


-친분을 유지하시던 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셔서 많이 적적하시겠습니다.


“그래도 그분이 남긴 책이 곁에 있으니까 괜찮지요.”


-건강은요.
 
“이전에는 안그렀터이만 인자는 (육신의) 고통을 참아내기가 힘들어요. 이렇게 서 있으모 몸에 열이 잔뜩 오릅미더.”


-몇 년 전에 생긴 (중앙)고속도로 때문에 여기까지 쉽게 올 수 있었습니다.


“고속도로가 생겨 더 나빠졌어요. 농로(農路)도 마이 없어지삘고. 옛날에는 마을 사람들이 술 묵고도 맘놓고 댕겼는데, 지금은 차가 쌩쌩 달리고 하니까 조심 조심해야 함미더.”


사용자 삽입 이미지어쩌면 이야기를 샘솟게 하던 산골마을을 고속도로가 휑하니 뚫어놔서 불만인 것인지도 모른다. 권선생은 “인자 고마 하입시더”라며 조용히 방문을 걸어 닫았다. 다시 정적이다. 처마 밑에서 바라본 집앞 뜰에는 민들레가 곳곳에 피어 있다. 그의 1969년 데뷔작 ‘강아지똥’에서 민들레는 설움과 소외를 딛고 일어선 ‘희망’ 같은 존재로 그려진다. 그의 동화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강아지똥처럼 서글프고 보잘것 없는 존재가 많다. 매맞는 할미소, 자식들 잃은 엄마, 잡혀죽는 양….


그로 하여금 ‘무명저고리와 엄마’ ‘바닷가 아이들’ ‘몽실언니’ 등 100편이 넘는 생생한 동화를 쓰게 한 힘은 ‘진실’이라고 권선생의 지인들은 말한다. 30년 지기인 숭실대 이반 교수(극작가)는 “권선생은 ‘어린이라고 해서 아름다운 것만 보여줄 것이 아니라 리얼리티를 전달해 줘야만 진정한 아동문학이 된다’고 믿고 있다”고 전했다.
 
많은 책을 냈으니 제법 돈을 모았을 법 한데도 그는 지독히 가난하다. “지금보다 더 크거나 화려한 것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환갑때 친구들이 “그동안 펴낸 책을 모아 전집으로 묶자”고 제안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런 식으로 하면 책 한권씩 내는 조그만 출판사는 죽는다”는 게 이유였다. 무공해 식품이라며 독자들이 가져온 선물도 같은 이유로 받지 않았다. “내가 이런 걸 먹으면 동네 구멍가게 사람들은 어떻게 사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요즘 그는 세상사에 가끔씩 탄식도 보탠다. 끝내 사랑이 이긴다고 믿는 그의 입에서 “시상에 정의가 어디 있노? 힘이 정의지…”라는 말까지 나왔다.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을 때였다. 최근에는 허락도 얻지 않고 자신과 이오덕 선생간에 오간 편지글을 책으로 펴낸 한 출판사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했다. 책을 모두 수거하는 것으로 일은 매듭됐지만 지금은 정작 손해를 본 출판사쪽에 미안해하고 있다.


올 여름 출간 예정인 ‘금강산 호랑이’(가제)는 어쩌면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른다. 기력이 달려 책상머리에 앉아 있기조차 힘든 탓이다.


뭔가 허전해 다시 문을 몇 번 두드렸지만 무반응이다. 어느새 빗발은 더 굵어졌다. 젊은 시절 그가 ‘종지기’ 생활을 하며 살았다는 함석지붕의 시골교회가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안동/글 조장래·사진 서성일기자 joy@kyunghyang.com
입력: 2004년 04월 30일 17:3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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