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중국의 소수 민족 오르첸족에게 한글을 보급하려 시도한 적이 있는데, 그때 오르첸족 노인을 상대로 오르첸족의 언어를 조사하면서 그들의 말을 한글로 표기하는 조사를 방송에서 본 적이 있었다. 오르첸족 노인이 말하면 녹음과 동시에 한글로 표기하는 과정을 거쳤다. 나중에 한글로 표기한 오르첸족 말을 조사를 담당한 우리나라 교수가 읽어보았는데, 오르첸족 노인이 굉장히 놀라며 이런 말을 했었다.
“한족은 아무리 가르쳐줘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이정도로 정확한 발음으로 우리 말을 말하는지 모르겠다.”
표의문자인 한자와 표음문자인 한글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에서 비롯된 차이이기도 하지만 음성을 문자로 기록하는데 효과적인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또 하나의 예이기도 하다.
물론 말을 글자로 표기한다는 것 자체가 완벽함을 기할 수 없는 과정이기에 세상에 완벽한 글자란 존재할 수 없다. 쉽게 생각해봐도 우리가 말하는 말은 연속적인 과정의 산물이지만, 글자로 쓰는 과정은 그 연속적인 일련의 과정을 분절체로 표기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이는 음성학의 학문적 기본 전제이기도 하지만, 연속적인 과정을 어떻게 분절적인 과정으로 설명하고 표기하는지는 아직도 어려운 일임이 분명하다.
한글이 훌룡한 글자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지만, 완벽한 글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한글의 훌룡함에 매몰된 나머지 미화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는 경계심이기도 하고.
한글이 얼마나 우리의 삶에서 소중한지는 이루다 말로 표현할 수 없다. 한 사람에게 있어 모국어는 그가 생각하고 창조하는 세계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모국어에 날개를 날아주는 것이 모국어를 표현하는 글자다. 말은 사라지지만 글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의 삶과 생각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어 주었다. 사라지고 말 사람의 생각과 말이 글자를 통해서 영원한 삶을 얻어 지금도 우리가 수천년전의 사람의 삶과 생각을 이해하고 또 다른 창조의 원천으로 받아들일 수 있으니 말이다. 바꿔 말해 문자 즉 글자는 인류 문명의 원동력 그 자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것.
반만년 역사의 한민족이라고 하지만, 고려시대가 되어서야 우리는 우리의 역사서를 갖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수많은 역사서가 있었다고 하지만 한자라는 생소한 글자 때문에 폭 넓은 수용층과 전파력을 갖지 못했다. 그 결과 고려시대 이전에 등장하는 그 많은 역사책 중에서 우리는 제목 말고 알고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한자가 청동기 시대에 이미 도입되었지만 우리가 한자를 제대로 사용한 것은 신라 하대에 들어서부터인 것 같다. 신라시대까지도 이두와 같은 표기법이 성행하였던 것을 보면 한자를 우리가 받아들이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을지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조선시대 양반들도 한자를 제대로 사용해서 글을 쓰려면 20여년이 소요된다고 한다. 하물며 고대시대에 한자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사람은 나라에서도 소수였음이 분명하다. 광개토대왕능비를 봐도 몇곳에서는 한문어순이 아닌 우리말 순서에 따라 한자를 배열한 부분이 있다. 나라에서 심혈을 기울여 역사한 비문에서도 이런 부분이 불쑥 등장하는 것을 보면 한자를 알고 한문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에게 낯설고 어려웠을지 짐작이 간다.
그러니 역사책을 써도 그 역사책을 읽을 사람이 많지 않았을 것이고 널리 퍼지지 않은 책은 수많은 전란시대를 거치면서 온전히 보관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는 고대시대에 쓰여진 우리 역사책을 제목만 알고 중국이나 일본의 사서를 통해 우리를 역사를 배운다. 이 얼마나 가슴 쓰아린 우리의 현실인가. 이 모두가 우리 말과 어울리지 않는 글자를 들여와 배운 까닭이다. 그때는 우리에게 한글이 없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고 현실이었지만, 우리의 역사를 우리 역사책으로 배우지 못하는 서러움이 그렇다고 사라지지는 않는다.
한글을 우리가 제대로 사용한지는 50년이 겨우 넘는다. 50년의 역사로는 우리의 글자생활이 온전히 꽃 피울 수 없는 짧은 기간이다. 이것은 우리 당면과제가 우리의 말과 글을 얼마나 다듬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에 대한 작은 실례가 될 수 있다고 본다. 5천년 역사중에 우리 말을 담는 그릇인 글자인 한글을 제대로 사용한지 5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 이 분발해야 할 시기에 영어공용어를 들고 나오는 미친 작자들이 활개치는 현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영어 미쳐 돌아가는 세상을 볼 때마다 한심한 것을 둘째고 밀려오는 부아와 짜증을 참을 수가 없다. 영어 잘해봤자 써 먹을 사람을 몇되지도 않을텐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