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범 48마리의 가죽을 이어 붙여서 만든 카펫

  명성황후가 사용했다고 해서 기사에도 나고, 우리나라의 부실한 문화재 관리의 현주소를 보여주었던 카펫. 내가 이 기사를 보고 관심을 갖았던 까닭은 이 카펫이 아름다워서도 아니고, 이것을 귀중한 근현대사의 유물이라고 생각해서도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엉뚱해 보일 수도 있는데, 지금 전세계에 남아있는 야생 아무르 표범의 숫자가 30마리 정도 밖에 안되기 때문에, 마흔 여덞마리의 표범으로 만들었다는 이 카펫을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들이 많이 밀려왔다.

  그 시절에는 카펫으로 만들만큼 넘쳐났던 표범의 개체수가 이제는 한반도에서는 거의 전멸이고, 러시아의 아무르 지방에서만 30여 마리가 남아 멸종을 눈 앞에 두고 있다. 30여 마리의 개체수로는 우리가 조금만 생각을 해도 멸종이 눈 앞에 다다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0여마리로는 근친교배는 물론이고 조그만 생태적 충격에도 종의 멸종해버리고 만다. 
  호랑이의 굳건한 기상과 우람한 덩치는 남성적미를 보여준다고 생각하지만 표범은 날래고 지혜로우며 특유의 섬세한 기질때문에 여성미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호랑이와 비교해보면 표범이 얼마나 아름다운 고양이과 동물인지 알 수 있다. 호랑이처럼 용맹스럽지도 않지만 조용한 습격자라는 별명처럼 은밀하면서도 날쌔고, 유선형의 유들유들한 몸매는 고양이과 동물중 겨눌 자가 없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한마디로 표범의 자태는 숨이 먹어가는 멋들어진 여성의 몸매처럼 자연이 빚어낸 극치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블레이크는 호랑이를 보며, Tiger 라는 시를 읊었다. 그는 호랑이의 눈과 힘줄을 통해 신을 보았지만, 나는 표범을 통해서 신을 본다. 표범은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또 한편으로 사라져가는 그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어찌 서럽고 슬프지 않겠는가. 이처럼 아름답고 지혜로운 동물이 사라져가는 현실이 말이다. 러시아의 아무르 지방에서 러시아 당국의 노력으로 호랑이의 개체수가 서서히 증가하고 있다는 소식은 들리지만, 아무르 표범의 소식은 깜깜하다. 아직도 표범을 노리는 밀렵꾼이 있다는 암울한 소식만 들려온다. 하느님이 창조한 한 종이 사라진 다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질서에 대한 인간의 반역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기독교인은 더욱 더 종의 보전을 위해 노력하고 환경의 중요성을 일상에서 뼈에 새기는 각오가 마음속에 자리잡아야 한다. 그것이 하느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율법이고 계명이라 나는 믿어의심치 않는다. 
  아델리아 홀 레코드를 통해서 이 카펫은 우리나라에 반환되었다. 주한미군이 헐값에 사들일 만큼 우리나라의 그 시절이 참담했다는 것을 이 카펫은 말해주고, 반환된 문화재를 또 우리가 얼마나 망각속에서 관리했는지를 또 이 카펫은 보여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카펫을 통해서 우리는 지구상에서 사라져가는 이 마지막 아름다운 생명의 최후를 다시 상기시킬 수 있다. 어떤 예술품도 표범의 아름다움에 접근할 수 없다. 사람의 손과 머리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지고 가치가 부여된 예술품과는 달리 살아있는 표범은 그 스스로 삶의 이유를 증명하고 아름다움을 선포한다. 그것이 하느님이 창조하신 이 자연의 위대함이고, 살아있는 생명의 존엄함이다. 
덧글.
  시베리아 호랑이는 한국 호랑이라고 불리며 정식 학명은 아무르 호랑이이다. 한국 표범 또한 아무르 표범의 우리식 표현이다. 우리 조상은 범이라는 순 우리말속에서 표범과 호랑이랑 같은 범으로 불렀다. 범은 호랑이였고, 표범은 말 그래도 표범이었다. 말 뜻에서 표범은 호랑이에 비해 그 무늬로 인해 표식이 더 용이해 그런 이름이 불러졌지 않았나 유추해본다. 우리 조상은 범을 무서워하면서도 범을 숭상했고 함부러 그들의 생활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다. 
 
  일제 시대를 거치면서 일제는 매년 수백마리의 대형 포식동물을 잡아들였다. 오늘 날 한마리만 등장해도 세상이 들썩일 범이 일년에 이렇게 많은 수가 일제에 의해서 사라져갔다. 산업화의 과정속에서 우리는 여우 또한 멸종시켰지만, 우리의 아름다운 범의 멸종에 일제라는 치를 떨며 이를 갈수밖에 없는 악마같은 존재가 가장 큰 원인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우리의 정신과 문화만 일제시대를 겪으며 파괴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산천과 온 생명이 일제시대를 겪으며 황폐해졌다. 국권을 잃는다는 것은 다시 말해서 한 나라의 무능을 말해주는 것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명령하신 창조질서를 위배한 민족의 반역이기도 하다. 오늘 날 남북으로 포탄이 오가는 현실또한 그 첫째는 우리의 무능이고, 일제의 폭압통치가 둘째다. 
http://www.koreatiger.org/ 한국범보존기금이라는 곳이다. 어떻게든 우리의 아름다움 범이 사라지는 것은 막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당연하고 시급한 의무가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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