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라는 것에 대해 잠깐 생각함


스물 한살에 첫사랑 만나서 불나방처럼 사랑의 불길로 뛰어들고, 이전의 잔잔한 파도와 같았던 신앙도 미친년 널뛰기처럼 오르고.

IVF에서 회심을 경험한 후 구교도에서 신교도로 진로를 수정한 나는 40일 작정 새벽기도부터 시작해서 수련회, 사경회, 부흥회, 기도원 등 안가본 곳이 없이 다 가봤다.

사랑이 떠나고 심연 저 바닥에서 움크리고 있는 심해어처럼 괴로워 몸부림 칠 때, 죽음이라는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가까이 다가와 앉아있었다.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그만큼 절실한 시절이었다.

사랑은 떠나면 돌아오지 않지만, 돌아온 믿음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개척교회를 10년이 넘도록 다니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언제고 때가 되면 다시 마음의 고향 천주교회로 돌아갈 생각을 하고 있었다.

힘든 개척교회 생활에 지친 목사님이 교회를 떠나고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있는 작은 교회 신도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성당에 나가 미사를 참석하면서도 나는 세례 교인이면서도 영성체를 받들지 못했다. 그렇게 몇년을 성당을 나가면서도 교적도 옮기지 않았다.

이번에 교적을 정리하고 고해성사를 하고 영성체를 모시게 된 까닭은, 같은 성당을 다니지만 이름도 몰랐던 청년의 죽음을 듣고 난 후부터. 믿음이라는 것이 한없이 불합리하고, 이성의 대척점에 서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름모를 청년의 죽음은 내 마음속에서 사라진 간절함을 불러일으켰다.

믿음…
우리의 주님 그리스도를 향한 그 청년의 간절함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그 간절함에 눈물을 흘리고, 이제는 내게 남아있지 않은 추억과도 같은 그 간절함이 그리워 한없는 눈물을 미사 동안 흘렸다.

모든 신앙인의 고백처럼 나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으며, 그분의 삶을 닮기를 감히 소망한다. 그것은 내가 믿음을 선택했지만, 그 믿음이 나를 선택하고 나를 구원한 순간부터 내게 주어진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운명의 길에서 벗어나 다른 길로 걷지만, 나는 아직도 이 길이 나의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갈대보다 나약한 사람의 품성으로 앞으로의 일을 기약할 수 없기에 나의 운명을 나는 장담할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삶이 지금의 나의 삶의 길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처럼 살지도 못하고, 그리스도처럼 믿음을 갖지도 못했다. 나는 나약하고 게으르다. 나의 게으름은 놀림 받아 마땅하지만, 나의 나약함은 내가 나약해서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는 나의 무기.

그리스도를 믿고, 권정생 선생님을 알면서부터 세상의 참된 정신은, 우리가 잘 보지 못하거나, 보려하지 않는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길거리의 개똥이 더럽다 피해가지만, 그 개똥이 민들레 홀씨를 품어 싹을 피워올리고 결국에는 꽃을 피워 자신의 소임을 다한다. 더럽고 비천하고 가난하다고 손가락질하지만, 그곳에 주님의 마음이 있고, 주님의 모습이 있다.

권정생 선생님의 ‘우리들의 하느님’에 아래 구절이 나온다.

얼마전에 가까운 시내에 나갔다가 돌아오려는데 버스비가 모자라 할 수 없이 완행기차를 타고 왔다. 그런데 기차안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자리를 내주면서 앉으라고 권했다. 나는 가까운 두 정거장만 가면 내릴 테니 괜찮다고 사양을 했지만 아주머니는 기어코 앉기를 권해서 황송하게 자리에 앉았다. 나는 앉아서 무심코 아주머니꼐 혹시 교회 나가시는 분이 아니냐고 여쭈었더니 아주머니는 금방 반색하면서 그렇다는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신기해 기뻐하며 묻지도 않은 말을 들려주기 시작했다.아주머니의 말에 따르면 의성지방 시골교회 집사님인데 한 십년전에 이상한 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들어보니 꼭 옛날이야기만 같은 내용이었다.

어느날 아주머니는 몹시 바쁘게 집안일을 하고 있는데 어떤 거지가 구걸을 하러 왔다. 정신없이 일에 몰두하고 있던 아주머니는 자기도 모르게 귀찮아서 퉁명스럽게 지금은 바쁘니 다른 데나 가보라고 거지에게 박대를 하며 내쫓은 것이다. 그런데 돌아서 나가는 뒷모습을 힐끗보니 놀랍게도 틀림없는 예수님이었다. 깜짝 놀란 아주머니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허겁지겁 쌀을 한 대접 떠서 달려나가 보니 거지는 그새 어디론지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옆집으로 또 옆집으로 샅샅이 살펴보았지만 역시 허사였다. 집으로 돌아온 아주머니는 주저앉아 통곡을 했다. 그때부터 아주머니의 눈에는 어떤 낯선 사람도 예수님으로 보이게된 것이다. 그렇게 아주머니는 십년을 하루같이 만나는 사람을 모두 예수님으로 알고 대접을 했다.

이야기를 다하고 나서 아주머니는 ”세상 사람이 다 예수님으로 보이니까 참 좋아요 내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드리고 싶어예.”

그날 나는 살아있는 동화의 주인공 같은 아주머니를 한없이 쳐다보며 부러워했다. 여태껏 들어온 설교 중에서 진짜 설교를 들은 것이다. 버스비가 모자라 기차를 타게 되었고 뜻밖에 예수님 대접도 받고 아름다운 이야기도 들었으니 그날은 꼭 천국에 사는 기분이었다. 그 시골교회 아주머니는 가장 복된 은혜를 받고 살아가는 분인 것이다.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감동스럽지만 오늘처럼 특히 나의 보잘 것 없는 믿음에 대해서 생각하다 읽으면 눈물이 난다.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꽉 차고 화면이 흐려진다. 나는 그 거지가 예수님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예수님은 거지로 태어났고, 거지도 돌아가셨다. 못나고 천한 그 목수가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을 구원하셨다.

늦은 밤에 나의 믿음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보다 권정생 선생님의 글을 읽고 또 눈물이 나고, 나의 이 작은 믿음이 세상보다 귀한 가치를 지녔다는 주님의 말씀을 새삼 떠올려보게 된다. 내가 거룩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내일 나의 믿음이 어제의 믿음보다 조금 나아졌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가진 자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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