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온다. 밤이 내려오니 내리는 빗소리가 노래가 된다. 음악도 잘 들리지 않았는데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차분한 마음이 교향곡을 부른다. 넘실거리는 현의 마찰음을 듣고 있자니 니 분절되지 않는 음, 현의 매력에 새삼 빠져든다. 평소 같으면 신경질적으로 들릴 수 있는 현이지만, 이렇게 비가 내리는 밤이면 형언 할 수 없는 상념의 세계로 나를 인도한다.
피아노처럼 분절된 음의 세계가 아니라 실처럼 이어진 연속의 세계. 때로는 단절없는 그 음의 세계가 부담스러워 의도적으로 외면하게 되지만, 이렇게 가까이 하게 되는 날에는 계속 계속 이어지는 그 음이 나를 저만치 떨어진 상념의 세계에 데려다 준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의 통속적이고 신파적인 면모. 그래서 쉽게 폄하 당하기도 하지만, 그의 음악에서는 누구나 다다를 수 있는 보편성이 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 2악장 아리에타. 그 절대적 이상의 세계는 때로는 가까이 하기 부담스럽고 누구나 접근 할 수 있는 음의 세계가 아니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그렇지 않지. 넋두리를 늘어놓는 그 절절한 이야기를 듣고 외면 할 수 없다. 베토벤 후기 음악이 감정의 세계를 넘어선 절대적 정신에 대한 의지라면,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그 정신의 반대쪽에서 목놓아 우는 범인들의 세계를 노래한다.
이 끝도 없이 넘실대는 감정의 음악을 듣다보면 마주하게 되는 선이 있다. 이 선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아슬아슬 그 선의 경계에 서게 된다. 하지만 넘을 수는 없지. 넘을 수도 없고 넘어서도 안된다. 그게 낭만주의 음악의 매력.
누군가는 목놓아 노래부르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 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초인이 되어 침묵으로 내일을 맞이 할 수는 없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이 장대한 슬픔의 서사시. 말러 교향곡이 빚어낸 색깔과 전혀 다른 색을 지녔다. 말러의 염세적인 세계관이 기존 교향곡과 다른 새로운 세계를 열어놓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그 새로운 길이 아닌 길에서도 자신의 길을 닦아놓았다.
아름답지만 통속적이지 않고 신파적이지 않다. 그래 반세기만 지나도 사라질 음악이라는 혹평에도 살아남아 그 빛을 잃지 않았지.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본령은 피아노지만, 오늘은 밤의 노래를 듣고 싶어 교향곡을 올렸다. 현악기들이 모여 노래하는 교향곡의 세계는 깊은 감정의 굴곡을 표현하기에 적당하다. 비가 내리는 밤에 현의 노래는 그래서 제격이다. 감정의 선이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도돌이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