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머리속에서는 내가 믿는 이 신앙이 과연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회의가 들었다. 과연 우리가 가는 이 길이 옳은 길인지 나 자신부터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그래서 이 혼란을 하나 하나 정리해보려 이 글을 쓴다.
조용기 목사님께서 대대적으로 신축한 전주 순복음 교회를 축복하기 위해서 내려온다고 대문마다 전단지가 붙여지고 길거리마다 전단지로 넘쳐난다. 이것도 모자라, 대형 현수막에 대형 홍보 문구로 치장한 유세차량 같은 교회 차량들이 선거철을 맞이한 듯, 소음공해를 뿜어내고 전주를 활개치고 다닌다.
이들은 이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목회자들이 그들을 그렇게 세뇌시켰기 때문이다. 존 후스의 화형식에서 사단아 어서 죽어라 외치며 장작을 나르던 노파를 향한 후스의 마지막 고백, 바로 ‘거룩한 무지’ 오늘 날 우리는 이 ‘거룩한 무지’속에서 살고 있으면 그 무지가 기독교를 왜곡시키고 기독교를 죽어가게 만들고 있다.
개혁을 외치고 신앙을 외치는 신실한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언제나 한결 같은 대답만 외친다. 우리 교회 우리 선교단만이 주님의 그릇이고 바로 여기서 개혁이 시작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생각의 결과가 수많은 종파와 분파로 오늘 날 한국 개신교를 장식하고 있다. 이 분열주의는 신앙의 독이다. 그것은 뱀의 독보다 사악하고 치명적인 독이다. 이 독에서 해독되지 않는 한 개신교의 본질 회복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개신교의 예배 또한 참 우습게 변모되어 왔다. 라틴어로만 떠들었던 카톨릭을 비난하며 자신들만의 예배를 창조하였지만 이제 그 창조의 정신은 사라지고, 모든 성도들을 관람객으로 전락시켜 놓은 화석화 되어버린 예배만이 남게 되었다. 아직도 카록릭에서는 회중찬양의 전통이 남아있지만, 오늘 날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에서 찬양은 성가대의 몫이고 찬양단의 몫이 되어버렸다. 예배자가 찬양자이던 과거의 전통이 예배자와 찬양자가 구별되어지고 전문화란 명목으로 그 경계가 더욱 분명해지고 있다.
목사들은 말한다. 말씀으로 변화받고 구원받는다고. 성도들은 말한다. 목사님 오늘 설교가 참 은혜스러웠어요. 맞는 말이다. 그런데 말이 너무 많아 문제다. 넘치는 말들이 오늘 날 우리의 정신을 어지럽히고, 아둔하게 만들고 있다. 넘치는 말들을 제어하지 못하고 서로 내가 옳다고 난리다. 온갖 불의마저 이 거룩한 말로써 포장되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입에 담기 더러운 오늘 날의 추악한 세태와 부패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나 스스로도 이것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것들은 모두 우리가 본질에서 멀어져서 발생한 결과들일 뿐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말이 아니라, 행동이다. 행하지 않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기독교의 본질은 능력에 있었지 모양에 있지 않았다. 우리는 본질을 회복해야 한다. 본질의 알지 못하면 회복 또한 없고, 목표마저도 세울 수 없다. 신앙인들은 깨어져야 한다. 깨어지고 다시 살아야 한다. 우리가 깨어질 때마다 하나의 교회가 다시 세워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