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하라고 했어요’라는 말의 불편함에 대하여”
이 글을 읽다보니 예전 선교단 시절 친구가 생각난다. 어쩌다 기도의 응답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나와 다르게 그 친구는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확신을 갖고 있었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나는 어떻게 그런 확신을 갖게 되냐고 물었다. 그 친구의 확신에 찬 대답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기도후 마음이 평안하면 그것이 기도의 응답이라는 것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기도라는 자기최면을 기도의 응답으로 착각한 것이 아닌가 싶다.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 이런 대답을 듣고 깊은 감화를 받았다면 교회를 갈 것이 아니라 병원을 먼저 갈 것을 권한다.
그런데 이런 사이비 믿음이 좋은 믿음으로 전염병처럼 횡행하고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면 이건 믿음이 아니라 착각이다. 착각을 믿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웃자고 던 진말에 죽자고 달라드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이런 자기 착각을 믿음과 확신으로 포장해 하느님의 뜻을 설파하는 얼치기 신앙인들. 이런 사람들에게 총이 주어지면 IS가 되고, 강단이 주어지면 사이비 목사가 된다. 본질적으로 이들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왜냐면 자기 생각과 뜻을 하느님의 생각과 뜻으로 포장해 세상을 왜곡하기 때문이다.
대형교회 목사들이 설파하는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 비전, 결국 헌금으로 시작해 교회 건축으로 이어지고 대형 집회를 통해 ‘모두 하느님이 하셨습니다’ 라고 결론내려진다. 결국 하느님을 신자들 주머니나 털어 건축에 열을 올리는 그런 존재로 둔갑시켜 버린 것. 이런 심각한 믿음의 왜곡은 믿음의 상태가 중병에 이르렀음을 의미한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하느님의 나라를 설파하며 만국의 하느님 열방의 하느님을 부르짖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필요한 것은 헌금이 아니라 회개고, 건축이 아니라 삶이다. 하느님의 성전은 저 거대한 교회당이 아니라 우리 개개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마차사고 이후 극적인 회심을 통해 철저한 기독교인으로 들어선 파스칼은 죽는 날까지 기독교인의 삶, 신앙, 철학에 몰두하였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다고 신앙고백한 글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아직도 남아있다. 이런 그가 이런 말을 남긴다. “인간은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행할 때일수록 희열에 넘쳐 철저하게 악을 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