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박물관에서

제주도 유배시기는 추사의 삶과 학문 예술세계가 한 단계 넘어 무위의 세계에 다다른 곳이다. 글씨는 뼈만 남은 것 처럼 기괴해졌고, 완고하고 타협없던 성격은 관용과 이해로 넘어간다.

제주도 유배를 가는 과정에서도 추사는 전주의 지방문인들을 폄하했고, 이광사가 쓴 해남 대흥사 현판을 보고 조선의 글씨를 망친 주범이 이광사라며 현판을 다시 써준다.

제주도 먼 뱃길을 거치고도 한 참을 내륙 깊숙이 들어와야 했던 이곳에서 추사는 영광과 고난 이 모든 것을 초월해, 오롯히 위대한 정신 하나로 한 세계를 일군다.

“완당의 글씨는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서법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어렸을 때에는 오직 동기창(董基昌)에 뜻을 두었고, 연경을 다녀온 후에는 옹방강을 쫓아 노닐면서 열심히 그의 글씨를 본받았지만 너무 기름지고 획이 두껍고 골기(骨氣)가 적다는 흠이 있었다. .. 만년에 제주 귀양살이를 마치고 바다를 건너온 다음부터는 남에게 구속받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었고 대가들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가(一家 )를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하며 바다의 조수가 밀려오는 듯하였다.”

연암의 손자 박규수의 평처럼 추사를 정확하게 묘사한 이는 없는 듯 하다.

 

추사를 좋아해서 간 곳. 빠듯한 일정에도 꼭 가야겠다는 신념으로 간 곳. 그 신념에 비해 큰 감흥은 없었던 곳. 다만 제주도에서 먼 이곳까지 귀향와 살았다는 생각을 하니, 비현실적인 공감이 생긴 곳.

추사의 삶이 글씨로 유명해져 글씨로만 기억되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추사가 일곱살 때 쓴 입춘첩을 보고 당시의 영의정 채제공이 글씨로 이름을 날릴 명필이지만, 글씨로 명망을 얻으면 불행지리라 예견했다는 일화는 실제와 허구의 사이에서 추사의 앞 날을 이야기해주는 일화가 아닌가 싶다.

추사는 당대에 겨룰자가 없을 정도의 동아시아 최고의 지식인었다. 자제 군관으로 북경에 간 이십대의 젊은 날부터 완원, 옹방강 같은 청나라 최고 지식인들과 교류가 가능했던 것도 추사의 비범함을 보여주는 예.

다만 추사의 완벽주의는 그가 남긴 상당수 저서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추사 스스로 불태운 것. 추사의 기록중 편지가 유달리 많이 남은 것도 편지는 그의 수중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 완벽주의는 추사의 성격과 맞물려 훗날 많은 적을 만들어내, 최고의 위치에서 하루아침에 그를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권돈인이 임금과 독대하며 추사를 구명하지 않았다면 오늘 날 우리는 추사 말년의 그 황금같은 글씨들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왕가의 후손으로 부족한 것 없이 자라고 승승장구 했던 추사의 영광의 나날들. 낙엽처럼 떨어져 나간 영광이 사라진 후에 추사는 온전히 정신의 힘으로 한 인간의 위대함을 일군 사람이다. 일상이 되어 버린 귀향살이의 고단함속에서 추사도 어쩔 수 없는 늙고 병든 인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롯히 그 정신으로 일궈낸 위대한 업적은 지금을 빛을 잃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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