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60년 3월 고향 처녀와 전남 진도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함석헌이 그곳까지 내려와 주례를 했다. 함석헌은 진도로 내려오는 길에 갑자기 <사상계>의 장준하가 보고 싶다며 장준하를 만나고 왔다. 그달 함석헌은 <사상계>에 ’레지스탕스’란 글에서 자신이 꾼 꿈 이야기를 썼다. 한 청년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데 바람에 나부낀 휘장이 날아와 못박는 사람과 청년 사이를 가로막더라는 것이었다. 그 청년이 장준하일 것이라고 확신한 함석헌은 장준하가 비서로서 모신 김구처럼 비명에 갈까봐 노심초사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religious/855653.html#csidx2faba283a747fe28a38be2e8650d9c4
정치, 정치인도 믿지 않았던 함석헌에게 유일한 예외가 장준하. 함석헌은 장준하에게 이 나라를 맡기면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왜 그렇게 장준하를 높이 평가하고 좋아하느냐는 제자의 질문에 함석헌 기백이 살아있다고 답한다. 일제강점기 해방 6.25 전쟁을 관통하는 민족의 시련속에서 장준하는 한 번도 자기 길위에서 흔들리지 않는다. 죽음도 흔들 수 없는 초인같은 기백의 사람이 장준하였다. 그런 인물이 개인적으로 만나보면 한 없이 부드럽고 지적인 사람이었다. 사상계 시절을 회상하는 장준하의 유일한 인터뷰 녹음을 들어보면 목소리가 투사의 목소리가 맞나 의심이 들 정도.
박정희와 가장 최전선에서 투쟁하던 장준하가 감옥에 갇혔을 때 함석헌은 옥중 장준하를 위해서 직접 선거운동에 뛰어든다. 여러분이 장준하를 구해주지 않으면 장준하는 죽습니다. 온몸으로 외치는 저 백발의 노인의 외침을 유권자는 외면하지 않았다. 정치인을 혐오하던 함석헌이 이렇게까지 장준하를 위해서 필사의 노력을 다한 것은 장준하를 통해 이 나라의 미래를 보았기 때문이다.
함석헌의 눈은 정확했지만 그렇기때문에 장준하는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장준하의 죽음을 예견했던 함석헌의 걱정과 고민은 그가 기고한 사상계의 글에 잘 드러난다. 장준하의 죽음을 예감했지만, 막상 장준하가 죽고나자 함석헌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동안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장준하라면 내가 흙이되어 디딤이 되어 이 나라를 맡기고 싶다고 고백했던 함석헌. 장준하가 떠난 그 빈자리를 대신하겠다며 찾아온 문익환 목사님을 만나 백만인 서명운동 가장 앞자리에 서명을 하고 다시 독재의 투장에 뛰어든다.
일제시대 6.25 독재. 민족의 가장 처절했던 수난의 한가운데 살았던 그는 죽는 날까지 그가 바랬던 농부의 삶을 살지 못한다. 내 자식만 소중한 이기주의를 경계해 자식들에게도 엄격했던 함석헌은 다 늙고 병들어서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생의 마지막 그 짧은 시간동안 가족들은 그렇게 엄격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90여년에 가까운 그 긴 삶에서 가족과 허락된 시간은 그 짧은 시간.
함석헌과 장준하가 잊혀지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살만한 시대가 된 것. 안타까운 것은 지금의 오늘을 위해서 온 삶으로 헌신했던 사람들이 잊혀지는 것. 기억해야 이 나라에 다시 그런 수난의 시대가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
“함석헌을 따르는 사람들은 부자가 될 수도, 일등이 될 수도, 높아질 수도 없었다”며 “그것이 바로 자신을 십자가의 제물로 내놓은 함석헌의 삶이었기 때문이었다” – 문대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