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상을 다녀오다

금요일 일요일 문상을 다녀왔다. 동호회 형, 친구. 모두 엄마를 보냈다.
나 역시 엄마를 보낸 기억이 있어 그 아픔을 공감하지만,
언제나 슬픔은 당사자의 몫이다.
시간이 지나야 또 나아지리라.

계절은 잠에서 깨어 봄을 맞이하는데,
들려오는 죽음의 소식을 들으니
삶과 죽음이 서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절대적인 영역에 대한 수많은 생각과 사상 종교가 있지만,
누구도 그 영역에 대해서 해설 할 수 없다.
그것은 초월자의 영역이고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절대적인 의지가 놓여있다.

삶의 의지만큼이나 죽음은 강렬하고 가까이 있다.

산자는 죽은자를 대면해야
살아있다는 그 삶의 온 가치를 깨닫게 된다.

믿음이 약해진 것인가?


그래 그건 맞다.
예전과 같은 섭씨 40도의 믿음은 사라지고 없다.
이런 나의 뜨뜻미지근한 믿음을 자랑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 반대편에서 한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예전에 믿음이 충만한 나였다면 티벳 고원을 오체투지로 순례하는 이들을 보며
우상에 빠진 무지몽매한 이로 봤을지 모른다.

지금의 나의 믿음에서 그들을 보니
그 숭고한 믿음에 진심으로 경의로 표하고 보다보면 눈물이 날 때도 있다.
나는 그들이 가진 그런 순수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쪽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손가락 질 하는 것이
종교의 한 단면에서 보자면 옳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종교의 온 단면으로 보자면 그건 옳지 않은 것이고,
종교를 떠나 그 사람의 삶을 사랑한다는 것은 항상 옳다.

내가 가진 이 기독교라는 종교는 이제 더 이상 믿지 않는 자를 손가락 질 하는 종교도 아니고
예수천국 불신 지옥이 떠 받쳐지는 종교도 아니다.
종교가 같던 다르 건 그건 중요하지 않다.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서 내가 누구를 판단하고 정죄할 수 없다.
나는 그저 하느님 앞에 작은 의인으로 살아가기를 바라고 바란다.

나는 감히 하느님과 다른 사람의 관계에
이래라 저래라 참견할 주제도 되지 못하고
그건 우리들의 하느님이 바라는 모습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의 일상에서 기도하고 묵상하며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와 나의 삶에 대해서 생각한다.

나는 더 겸손해져야 하고
낮아져야 한다.
왜냐면 나는 아직도 교만하고 나태하기 때문이다.
이런 내가 어떻게 다른 누구를 정죄하고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

답답함


엄마떠나고 마음속에 답답함이 생겼다
뭘해도 사라지지 않는 이 마음속 답답함
크게 한숨을 들이쉬어도 답답하다
아직도 꿈속에서 자주 엄마를 본다
뭘 사들여도
뭘 즐겨도
뭘 해도
답답하다
마음이 답답하니 얼굴 인상도 답답해진다
내장산에 집을 짓고 엄마곁에 살면 나아질까
마음속에 가득한 이 답답함.
산속으로 들어가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