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레스의 쇼팽을 듣는 밤


쇼팽은 역시 밤이지.얼마만에 책상에 앉아 음악을 듣고 블로그에 글을 써 보는지 모르겠다. 직장이라는 곳에 얽매이다 보니 생각의 범위도 자유도 내가 원했던 방향과는 거의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금융자본주의에 분노했지만 그곳에 기생해 밥을 먹고 살아간다. 이것이 옳은 삶인가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곳을 박차고 뛰어나갈 용기도 기개도 이제는 다 사라진 것 같다.

신영복씨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읽으면서 한 개인이 극한상황속에서도 어떻게 자신을 성찰하고 내적혁명을 이뤄가는지 볼 수 있었다. 그것은 죽음과도 같은 정체된 곳에서 살아 숨쉬는 한 사람의 긴 호흡이 얼마나 치열하고 보이지 않는 한 세계를 이처럼 심오하게 만들었는지… 읽는 내내 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른다.

다시 내가 자유롭다고 생각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언제나 마음속에 움틀거리고 있는, 이제는 생각이 아니라 동경과 그리움의 대상. 나는 다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이제는 작은 내 집도 있고 가진 것이 많아졌는데 행복이라는 질문에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한 숨이 길게 나오는 밤이다.

언제 새벽에 깨어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예전의 나, 나는 새벽의 그 세상을 눌러 정적을 지배하던 그 새벽의 기운을 참 좋아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에도 예민하게 반응 할 수 있었던 섬세함도 갖고 있었고, 동이 트기 전의 그 깊은 어둠 또한 사랑했었다. 이제는 새벽은 내가 알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다른 세계가 되어버렸다. 내일이라는 부담의 벽이 나와 새벽 사이에 둘러쳐졌다. 그 벽을 넘고 새벽의 그 땅에 발을 내딛는 것이 내일라는 부담을 이겨내는 용기가 되어버린 지금.

오랜만에 쇼팽을 듣는다. 쇼팽은 역시 밤에 제격이다. 밤이 더 깊어지고 서리가 내릴 때 즈음 더욱 쇼팽은 안으로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음악이 된다. 피레스의 쇼팽 음반을 듣다보니 모라벡의 부서져 사라질 것 같은 터치감이 없이도 이렇게 섬세한 음악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균형감 있고 템포도 그 속에서 자유롭다.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버린 이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대단한 피아니스트인지 새삼 감탄하는 밤. 오랜만에 쇼팽 음악을 듣고, 또 그 음악의 아름다움에 감동을 받는다.

봉순이


SBS 봉순이 편을 봤다.
어릴 적 집 주변 논에는 미꾸라지가 천지였는데,
지금은 귀해서 돈주고도 못 사먹는 세상이 되었다.
농약을 치지 않고 재배하는 농민들의 그 수고를 어찌 다 쉽게 말 할 수 있으랴.
그 숭고한 수고 덕분에 논에서 되살아나는 생명들을 보니
눈물이 흘려내렸다.
생명이라는 것은 절로 주어진 것도 아니고
날로 사람이 사람답기 어려워지는 이 세상을 되돌리는 그 숭고한 희생이 있어서
생명이 살 수 있는 것이고
그 생명들이 우리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준다.
우리가 논에 사는 미꾸라지 한마리를 물건이 아닌 생명으로 생각할 때
돈이 줄 수 없는 위안을 거기서 받을 수 있다.

오랜만. 일상..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중
오늘 퇴근길에 비가 시원하게 내려주셨는데,
자전거는 내리는 빗물에 세척이라도 하지만,
초고도근시 안경잡이인 나는 눈 뜨기도 힘듬.

하지만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니
보이지 않은 풍경들이 보인다.
지나가는 학생들의 얼굴도 군중이 아닌 한명 한명의 학생으로 보인다.

어려서 소중한지 모르는 것들이 많겠지만,
그래서 얼마나 아름다운 소년소녀들인가.
모두 다 아름다운 청춘들이다.

이제는 웃는 일보다
인상쓰는 일이 많은 나이가 되어버린 나에게
뭐가 그지 좋아서 매번 웃어대는지 알 수 없는 여고생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

슈베르트 마지막 소나타를 듣는 비오는 밤.
이 비에 가뭄은 가시고
만물은 더욱 피어날거다.

그리고 봉순이 둥지가 어서 완성되어
봉순이가 봉화에 터를 잡았으면 좋겠다.
요즘은 잘 때에도 봉순이 생각이 난다.
봉화에가서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