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영화 밀양에는 하느님이 용서했다 말 한마디로 편하게 사는 사람이 나온다. 나는 이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용서는 당사자와 하느님 사이의 문제인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용서는 상대방이 용서해주어야 하는 것.

하느님에게 죄를 지은 것과 사람에게 죄를 지은 것의 가장 큰 차이는 절대적 용서의 대상과 용서를 인정해주는 대상의 차이다. 진정한 회개가 따를 때 하느님이 용서하지 못하는 죄는 없다. 하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럼 하느님이 용서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용서받은 것인가? 나는 용서받기 위해서는 용서받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느님이 용서하든 사람이 용서하든의 문제가 아니라 용서받았기 때문에 살아야 하는 삶에 대한 문제다.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니라 사는 것이 믿음이다. 때문에 기독교 신앙안에서의 용서는 삶이 수반되어야 한다. 삶이 수반되지 않는 믿음과 용서가 다 무슨 소용인가. 그것은 거짓의 또 다른 이름이다. 남은 쉽게 용서하지 못하면서 나는 쉽게 용서받는다. 싸구려 기독교가 낳은 이 시대의 비극이다. 용서라는 거룩한 행위가 면피용으로 둔갑해버리는 그 순간 기독교라는 이 유서 깊은 종교는 싸구려 사이비 종교가 되어 버린다. 그것은 용서라는 이름의 면죄부를 남발하며 싸구려 삶을 살아가는 우리 믿음의 모습이다.

하느님이 용서하셨는데 너가 뭔데? 이런 싸구려 답변을 듣기 위해서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런 싸구려 믿음을 믿음이라 착각하는 현실. 교회가 병들어가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믿음이 싸구려인데, 어떻게 교회가 싸구려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드레푸스여사 재발매 음반

드레푸스 여사의 영국모음곡을 듣고 있자니 제성이형 지적대로 악기선택이 두고두고 아쉽네.

데논음반에서 들었던 그 빛나는 음색이 많이 퇴색된 느낌.

훌륭한 목수는 연장탓을 하지 않는다지만 연주자에게 악기는 연장이 아니라 연주자의 또 다른 자아가 아닐까 생각한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명연주자들은 자기에게 어울리는 악기지니고 있었다. 피아노처럼 태생적으로 운반이 어려운 악기까지도 짊어지고 다닌 연주자들이 있었으니까.

그만큼 악기는 연주자에게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이다. 아직도 피아노를 싸들고 다니는 짐머만이 난 이해가 돼.
그 모습이 또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만큼 악기를 소중히 여기기에 연주도 그렇게 대단한거다.

 

 

 

 

 

사랑의 교회 단상

사랑의 교회 사태를 지켜보면서 그 동안 전임 목사님 아래에서는 은혜가 충만했는데 교회가 어찌 이렇게 되었는지 탄식하는 신실한 분들의 글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분들이 틀렀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목사를 후임으로 내정한 것도 전임 목사님이고 강남의 대형교회로 성장시킨 것도 전임목사님이다.

단언컨데 세상에 성서적인 대형교회는 없다. 큰 교회가 어떻게 성서적일 수 있는가. 대형마트가 소상공인과 공존의 상대라는 말과 다를 것이 없다.

형제자매라고 부르면서 누가 우리 교회 형제자매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많고 규모가 크다보니 작은 교회보다 더 나은 점은 많겠지. 하지만 그게 신앙과 무슨 상관인가. 신앙은 관계속에서 성장한다. 하루보고 한번보는 관계가 아니라 꾸준함속에서 성장하는 관계.

그 관계가 어떻게 규모속에서 성장 할 수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다. 큰교회 다니는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모르지만 나는 그 사람들이 알던 모르던 나의 하느님에 젖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의 하느님이 사라지고 나의 하느님이 가득한 세상에 평화가 발붙일 곳이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