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을 잘 구분을 못하시는 분들에게…

말과 글은 다른 겁니다.
따라서 한국말과 한글도 다른 겁니다.
우리가 역사시대 이후 쭉 한자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한자는 중국말하고도 매칭이 잘 되지 않는데, 우리 말에 잘 어울리겠어요.
이두 같은 것이 왜 나왔는지 생각해보면 그건 당연한 겁니다.

우리말에 중국말이 상당부분라고 말씀하신 분의 글을 읽고 이런 글을 쓰는 건데,
우리말에 중국말의 어느 정도는 흔적이 많이 남아있죠. 글자를 빌려오다 보면 글자를 읽는 법도
어느 정도는 같이 따라오기 마련이니까요.
이건 어휘부분에서 한자차용에 따른 부분이고 우리 말에서 한자나 중국말의 영향은 사실 과대된 측면이 많습니다.
우리는 한자를 빌려와 우리식으로 읽기 때문에 한자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말이 우리말에 영향을 많이 끼쳤다는 건은 사실이 아닙니다.

문법이라는 부분을 언급하신 분도 계시는데,
문법이 있고, 말이 생긴 것이 아니라
말이 있고 문법이 생긴 것입니다.
따라서 문법은 말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것이죠.
우리말이 문법적으로 뒤쳐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에 대한 문법 연구가 늦게 시작한 것이 맞습니다.

말은 그 자체가 연속적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표기하는 글자는
그 연속적 특성을 분절적 특성으로 바꿔놓은 것입니다.
한글은 이런 말의 특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문자로 옮겨놓은 기호체계입니다.
이런 한글을 제대로 사용한지는 해방이후 혼란기, 6.25 동란들을 빼면
50년이 좀 넘을 겁니다.
그동안 이정도 말과 글의 발전을 이룬 것은 한글이 가져다 준 놀라운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각 사람에게 가장 논리적이고 최고의 말은 모국어 입니다.
이 말은 논리적인 말은 세상에 없다는 뜻 입니다.
“영어는 논리적인데, 우리말은 안 그래”
이런 말은 따라서 말 자체가 비논리적인 것이죠

외로움은 이겨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외로움을 못 견디게 싫어하 던 때가 있었지만,
누구나 그렇듯 외로움은 이겨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 외로움의 꼭지점에서 만난 첫사랑은 삶은 모든 것이라 생각했지만,
모든 첫사랑처럼 사랑이 떠나면 헤아릴 수 없는 절망에서 헤메게 된다.

역설적이게 그 절망의 깊은 바닥에서 생의 의지를 보았고,
그때부터 외로움을 이겨내려는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외로움 앞에 겸손해졌을 때,
나는 비로소 외로움을 바로 보게 되었고,
그때부터 삶의 2막이 시작되었다.

남들처럼 왜 살지 않냐고 뭐라하지만,
나는 이미 남들처럼 사는 것은
아무 의미도 기쁨도 없다.

무제

삶의 방향성에 대한 고민이 논실마을 집에만 오면 계속해서 이어진다.
요즘은 얼마전 돌아가신 정호경 신부님 생각이 계속난다.
고독과 노동속에서 활짝 피워낸 그분의 삶.

자율이 아닌 타율이 빚어낸 노동의 결과는 얼마나 참담한가.
동시에 자율이 빚어낸 노동의 태만은 또 얼마나 참담한가.

밤의 소리를 듣고 있으면
내 마음의 소리가 같이 들린다.
말은 없지만 나의 한숨이 소리에 묻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