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연아님의 수필 – 누구나의 가슴에도 빙하는 흐른다

누구나 가슴속엔 녹지 않는 빙하가 있다
– 주연아

사람들은 누구나 크고 작은 상처를 지니고 살아간다.
그 상처에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과 볼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우리들의 몸 위에서 아픔을 주던 상처는 시간이 흐르면 피가 멎고 아물어 흔적만을 남긴다.
그 흔적은 새살이 돋아난 흉터로 존재할 뿐 그것을 대할 때 새삼 고통을 느끼지는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아문 흉터를 익숙해진 내 몸의 일부로 받아 들이게 된다.
하지만 우리들의 영혼에 흠집을 내었던 상처는 시간이 흘러도 피가 멎지 않는다.
그것은 사라진 듯 하다가도 뾰족한 송곳으로 되살아나 우리의 심장 속을 후벼댄다.
응어리진 상처,그리고 미처 치유되지 않은 상처들은 어느날 홀연히 나타나 고요하던
내 핏줄들을 흔들어 깨우고 또다시 눈물을 흘리며 울어 대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관계’로 인하여 상처를 받는다.
그 관계가 나와 가까운 사이일수록 상처의 비중은 커진다.
사랑하는 연인의 변심으로, 친한 친구의 배신 또는 부모의 편애 때문에
우리의 마음엔 깊고 깊은 골이 생기게 된다.
나도 수많은 상처를 지니고 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마음껏 미워하고,
더 이상 다치지 않기 위하여 혼자만의 밀실을 마련한 나,
나를 보호하고 내 상처의 눈물을 감추기 위하여 깊숙한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는 스스로 그 곳에 빠져버린 어리석은 동물이 되고,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입에는 재갈을 물린 미움의 노예가 되기도 했었다.
나의 영혼은 또한 저급하여 알라의 신봉자도 아니면서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원리를 써먹기도 했다.
나를 아프게 한 상대편에게 상처를 줌으로써 보상을 받고,
치유되지 않은 내 상처를 남에게 투사하여 화내기도 했다.
이유 없이 미워도 했었다. 그리하여 마음속엔 언제나 녹지 않는 빙하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밀실 안의 공간은 자폐의 공간일 뿐, 도피를 함으로써 망가지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이와 눈의 원칙보다 우선하는 부메랑의 법칙이 있다는 것을…
상처를 상처로 갚는다면 이 세상은 유혈이 낭자한 살벌스런 복마전일 뿐,
나는 진작에 어두운 밀실을 버리고 넓은 광장! 으로 걸어 나왔어야 했던 것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상처에 소금을 뿌려 덧나게 하고 싶지 않다.
내 상처의 채마밭에 미움이란 거름을 더 이상은 주고 싶지 않다.
미움은 내 영혼을 갉아 먹는 병균, 그리고 그 병의 끝이 없는 악순환의 고리일 뿐,
나는 이제 그 사슬에서 자유로와지고 싶다.
오십의 문턱에 선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인간의 영혼이 동물의 그것과 다른 이유를…
나에게 상처를 준 이를 용서하는 일이 곧 나를 치유하는 것임을…
내가 상처 입힌 사람에게 용서받음으로써 진정한 평화가 온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또 아는 게 있다. 성인이 아닌 우리에게 용서란 얼마나 하기 힘든 것인지를…
하지만 인디언 속담에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어떤 사람을 이해하려면 그 사람의 신을 신고 일 마일을 걸어 보아야 한다는 그 말.
남의 신을 신고 일 마일을 간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의 눈높이가 아니라 그의 지평에서,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를 본다면
조금은 쉬워지지 않을까. 이해하고 마침내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

누구나 가슴 속엔 녹지 않는 빙하가 있다. 그 위에 떠 있는 크고 작은 빙산들… !
그의 아픔을 보듬고 싶지만 두 개의 눈 밖에 없는 나는 그것을 보지 못한다.
만약 나에게 어린 왕자의 눈이 있다면 그 맑은 심안으로 빙산들을 보아내고,
수면 아래 얼어붙은 뿌리마저 헤아릴 수 있을 텐데…
그리하여 쓰라린 우리는 서로에게 익숙히 길들여질 텐데…
혹은 나에게 천 개의 눈이 있다면 나는 그의 슬픔을 단번에 꿰뚫어 보고,
천 개의 눈에서 흐르는 뜨거운 눈물로 그 차가운 빙산을 녹일 수 있을 텐데…
그리하여 그 빙하가 나의 눈에서 그의 눈으로,
그의 가슴에서 나의 가슴으로 흐르게 할 수도 있을 텐데…
그 해빙의 봄날을 위하여,
나는 그를 얼싸안고 그는 나를 껴안으며 서로를 사랑하고 싶다.
두 뺨을 부벼대며 맨 발로 걸으며,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사랑하고 싶다.
사랑이 없는 용서란 위선의 몸짓임을 알기 때문에…

출간(2002년, 교음사)

지애누나 블로그에서 읽고 옮겨옴…

 

너구리의 죽음

로드킬 당한 너구리가 아스팔트 위에 널부러져 있는데,
그냥 지나쳐왔다가 마음에 걸려서 되돌아 가 한참을 쳐다보다
도로를 건너, 너구리를 들어 옆 숲 구덩이이로 힘껏 던졌다.
묻어주고 싶었는데 삽도 없고 잠시 마실 나온 옷 차림이라 적당한 곳에 그곳밖에 없었다.

생명의 온기가 사라진 사체를 만지는 느낌은 끔찍하기까지 하다.
나는 아직도 교통사고로 죽은 우리 메주를 처음 만졌을 때의
그 서늘한 기운을 잊지 못한다.
생명이 사라진 생명은 얼마나 처절하게 서글프고, 무서운가…
죽음은 그런 것이다. 살아있을 때의 모든 것을 다 반대로 바꿔놓는다.
그래서 살아있다는 것이 귀한 것이고 생명이 귀한 것.
세상 그 어떤 금은보화도 죽은 생명을 되살릴 수 없다.

운전을 해야 한다면 늘 조심했으면 좋겠다.
이제 조금 살아나려고 하는 온 국토의 생명들이 무참히 도로에서 죽어가고 있다.
내가 죽은 너구리를 만졌을 때의 끔찍함 보다 더 무서운 것은
도로에서 소리없이 죽어가는 그 많은 생명들의 소중함이 그저 한 미물이 죽은 것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젤렌카를 다시 듣는 기쁨…

41asyXVCtKL._SS400_.jpg

요즘 젤렌카의 음악을 자주 듣고 있다.
음반이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웬만한 것은 다 구입해서 듣는다.
그의 레퀴엠을 듣고나서 그의 음악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고,
요즘 그의 일련의 곡들을 들으면서,
바흐와 동시대를 살았던 이 위대한 작곡가를 새삼 재발견하게 된다.

그의 음악에는 바흐 음악과 비슷하면서도,
바흐보다 더한 인간의 감정이 숨어 있다.
그래서 격하게 슬플 때도 있다.

입동을 맞이하는 때,
겨울이 두렵지 않은 음악이다.

[audio:http://k003.kiwi6.com/hotlink/jk5jq14km1/zelenka_track_5.mp3|autostart=y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