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회사일 = 지겨운 회사일.
뭐 어쩔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어제부터 내린 비에 세상이 맑다.
내 마음까지 맑아진 듯.
연휴동안 뭘 할까 즐거운 고민 시작.
내 지나가는 한 마디도 잊지 않아준 동료.
혼자라 외롭지 않냐고 하지만 혼자라 외롭고 즐겁다.
집이 넓어 외롭지 않냐고? 집이 넓어 운동하기 좋다.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왔다.
마음속에 작은 기쁨과 설레임이 있다.
어찌보면 나의 삶 반을 살았지만,
살아서 행복하고 축복받은 삶.
카테고리 보관물: 기억 # 1
비오는 밤
비가 온다. 밤이 내려오니 내리는 빗소리가 노래가 된다. 음악도 잘 들리지 않았는데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차분한 마음이 교향곡을 부른다. 넘실거리는 현의 마찰음을 듣고 있자니 니 분절되지 않는 음, 현의 매력에 새삼 빠져든다. 평소 같으면 신경질적으로 들릴 수 있는 현이지만, 이렇게 비가 내리는 밤이면 형언 할 수 없는 상념의 세계로 나를 인도한다.
피아노처럼 분절된 음의 세계가 아니라 실처럼 이어진 연속의 세계. 때로는 단절없는 그 음의 세계가 부담스러워 의도적으로 외면하게 되지만, 이렇게 가까이 하게 되는 날에는 계속 계속 이어지는 그 음이 나를 저만치 떨어진 상념의 세계에 데려다 준다.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의 통속적이고 신파적인 면모. 그래서 쉽게 폄하 당하기도 하지만, 그의 음악에서는 누구나 다다를 수 있는 보편성이 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번 2악장 아리에타. 그 절대적 이상의 세계는 때로는 가까이 하기 부담스럽고 누구나 접근 할 수 있는 음의 세계가 아니다. 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그렇지 않지. 넋두리를 늘어놓는 그 절절한 이야기를 듣고 외면 할 수 없다. 베토벤 후기 음악이 감정의 세계를 넘어선 절대적 정신에 대한 의지라면, 라흐마니노프의 음악은 그 정신의 반대쪽에서 목놓아 우는 범인들의 세계를 노래한다.
이 끝도 없이 넘실대는 감정의 음악을 듣다보면 마주하게 되는 선이 있다. 이 선 너머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아슬아슬 그 선의 경계에 서게 된다. 하지만 넘을 수는 없지. 넘을 수도 없고 넘어서도 안된다. 그게 낭만주의 음악의 매력.
누군가는 목놓아 노래부르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 할 수 있어야 한다. 모두가 초인이 되어 침묵으로 내일을 맞이 할 수는 없다.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내는 이 장대한 슬픔의 서사시. 말러 교향곡이 빚어낸 색깔과 전혀 다른 색을 지녔다. 말러의 염세적인 세계관이 기존 교향곡과 다른 새로운 세계를 열어놓았지만, 라흐마니노프는 그 새로운 길이 아닌 길에서도 자신의 길을 닦아놓았다.
아름답지만 통속적이지 않고 신파적이지 않다. 그래 반세기만 지나도 사라질 음악이라는 혹평에도 살아남아 그 빛을 잃지 않았지.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본령은 피아노지만, 오늘은 밤의 노래를 듣고 싶어 교향곡을 올렸다. 현악기들이 모여 노래하는 교향곡의 세계는 깊은 감정의 굴곡을 표현하기에 적당하다. 비가 내리는 밤에 현의 노래는 그래서 제격이다. 감정의 선이 절정에 다다르는 순간,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도돌이표.
말의 습관
한자병기. 한자교육. 하면 다 좋지. 세상에 배워 나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공교육에 한자를 강화해서 말과 글 생활이 나아진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말은 지배당하지 않는다. 말의 습관은 항상 변화하고 그 변화의 모습 또한 예측이 불가능하다. 사람이 생물이듯이 말도 생물이고 말을 적는 글도 그래서 생물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말과 글 또한 앞으로 어떠한 형태를 띄게 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지금의 관점에서 우리의 말과 글을 생각한다. 지금 세대의 말과 글 사용이 옳은 줄 착각한다. 어린 세대의 말글 사용에 대해서 통탄을 한다. 그 말이 옳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옳건 그르건 그건 아무 상관이 없다. 말과 글은 그런 것이다. 잘못되면 잘못된대로 잘되면 잘되는대로 언어대중의 습관이 결국에 결정할 것이다. 한자 몇 자 더 가르치고 한문교육 강화한다고 해서 나아지거나 변화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어린 세대의 말글 생활이 우리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걱정하며 언어의 퇴화까지 염려한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 세대는 분명 우리보다 나은 언어생활을 영위하고 또 발전시킬 것이다. 인간이 진화한다면 말과 글 또한 같이 진화한다.
그럼 즉흥적이고 즉물적인 언어생활을 그냥 내버려둬야 할까. 답은 쉬운 말을 사용하고 쉬운 글을 쓰는 것이다. 사고의 깊이는 어려운 단어와 복잡한 문장구조 속에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쉬운 말과 글을 통해서 점차 심화되어가는 과정이다. 함석헌이 권정생이 어려운 말을 몰라, 어려운 글자를 몰라, 말과 글을 그렇게 사용한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 세대가 겪고 있는 문제점의 대부분은 본인 생각하는 피상적이고 복잡한 문장구조에 대한 자부심에서 시작한다. 길고 복잡하고 어려운 문장을 완성해 내고 그 속에서 자기 위안을 찾는다. 결국 먹물이 먹물의 티를 벗어나지 못해서 말글이 오염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말과 글은 쉽게 쓰여져야 하고 보다 넓은 언어대중에게 접근이 가능해져야 다양한 표현과 접근이 가능해진다.
늙어 한글을 배운 어머님들이 쓴 시를 읽다보면 어려서부터 수만권을 책을 머리속에 집어넣은 지식은 쓸 수 없는 감동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글자는 책속에서만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한자만 떼어놓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글자가 글을 이루며 생명을 얻어가는 과정은 그것을 사용하는 이의 창조과정이다.
나는 알파벳과 한자의 경쟁에서 한글이 어떤 지위를 얻게 될지 예측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우리 말은 한글을 통해서 가장 우리 말다운 형태를 띄게 될 것이고, 결국 그 결말 또한 역사의 과정처럼 진보하게 될 것이라 믿는다.